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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초연을 올린 창작 뮤지컬 <라이카>를 관람하고 왔다. 소련의 최초 우주탐사견 라이카의 실제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해당 극은, 라이카가 지구를 떠난 후 어린왕자의 행성인 B612로 불시착한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인간으로부터 희생된 라이카와, 인간의 모순을 짚으며 성장해온 어린왕자의 만남은 뮤지컬이 진행되는 내내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함께 인간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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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는 인간에게 희생되지 않은 적이 없는 존재다. 그는 소련의 떠돌이 개로, 길거리의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먹으며 자라왔다.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푸른 풀밭과 풍부한 자연의 먹거리 대신, 차가운 건물 사이를 배회하며 영양가 없는 음식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 당연했던 그의 삶이다. 그런 그는 갑작스럽게 인간으로부터 포획 당했고, '관리'라는 단어 아래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눈길과 손길을 받았다. 온화하고 침착하게 인간들의 모든 고된 훈련을 견뎌낸 그는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선택' 받았고, 그렇게 지구를 떠나 죽어도 돌아올 수 없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린왕자는 두 번의 지구 여행 끝에 지구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 존재다. 순수한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며 인간이 갖고 있는 모순을 짚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라이카의 등장은, 인간으로부터 희생되었기에 마땅히 자신과 함께 인간을 혐오해줄 존재로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생명을 이용하는 인간에 대한 적대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미는 어린왕자의 곁에서 어린왕자의 변화를 지켜봐온 존재다. 그가 사랑했던 순수한 어린왕자가 감정에 매몰되는 과정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동시에 어린왕자가 이야기 하는 인간에 대한 적대심에 담겨진 모순을 짚어낸다. 어리지 않은 어린 왕자가, 점차적으로 인간의 모습과 닮아감을 느끼고 관람객들에게 어린왕자 또한 갖고 있는 모순을 은근히 짚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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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을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위화감은, 인간도 어린왕자도 라이카를 대하는 태도에 시혜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모순 때문이었다.


라이카가 사랑했던 연구원 캐롤라인은 처음 만난 순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관리해줄 사람이야. 아주 잘해주겠다는 뜻이지." 이 말 속에서 '관리'는 친절과 보살핌의 의미로 포장된다. 그렇게 캐롤라인의 손에서 애착을 배우게 된 라이카에게 '관리'는 곧 '사랑'의 동의어가 된다. 그래서 어린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우주의 모든 별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하자, 라이카는 그것이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느끼며 반가워한다. 이 장면은 라이카가 인식하는 '관리'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말로 관리와 사랑은 같은 말일까? 사전적 의미에서 '관리하다'는 것은 통제하고, 지휘하며, 감독하는 행위다. 이는 곧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무시하며, 관리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결국 라이카는 캐롤라인을 비롯한 인간들의 '관리' 속에서, 그 대가로 죽음을 향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자기중심적인 논리와 함께, 감사의 인사와 '세계 최초'라는 개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명예를 선물받으며 말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 라이카의 의지는 단 한 번도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게 B612에 도착한 라이카 앞에 나타난 어린왕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멈추고 다른 행성과 존재들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지구를 없애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우주와 생명 전체를 위한 일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나 정작 그 계획 속에서 희생될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인간 외의 다른 지구 생명체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는 라이카의 질문과  '어린왕자가 관리하는 우주에 지구는 어째서 포함되어있지 않은가' 등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장미의 말에 그저 "우주를 위한 일이야.", "그들도 기뻐할 거야." 라고 답하는 어린왕자의 모습은, 그가 경멸하던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과 닮아 있다.


사실 어린왕자의 자기중심성은 지구 말살 계획 외의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라이카의 바람과 달리, 그는 "너를 위해 만들었다"며 캐롤라인을 본뜬 로봇 ‘로케보트’를 선물한다. 라이카는 그 로봇을 마주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과연 어린왕자는 진심으로 라이카를 위했던 걸까? 라이카를 위해 로케보트를 만들었다는 그의 말과 행동 속에는, 정작 라이카의 마음과 의지는 담겨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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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없애는 것만이 답이라고 믿는 어린왕자와, 그에 반대하는 라이카의 대립은 다소 갑작스럽게 해소된다. 라이카는 “인간이 후회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에 어린왕자는 마음을 가다듬은 채 라이카의 뜻을 받아들여 지구를 소멸하지 않기로 한다. 사실 라이카의 말에는 '인간이 어떻게 후회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었고, 그저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억지와도 가튼 주장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왕자는 “네가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말한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러한 갈등 해소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을 '어린왕자가 인간을 용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가 라이카를 대하는 태도에서 내적인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본다면,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수 있다. 어린왕자는 단순히 인간을 향한 마음에 변화를 겪은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항상 타인의 결정에만 휘둘려온 라이카를, 어린왕자는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게 되며 갈등이 해소된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납득되지 않고, 그 구조마저 불분명한 라이카의 말에도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는 이유는 어린왕자가 더 이상 라이카를 ‘관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독립적 존재로서 ‘존중’하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흐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카의 설득을 따르게 된 어린왕자의 변화는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핵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 타인이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말이다.


아쉬움이 없는 극이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특히 어린왕자의 '동화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핵심적인 특징을 계승하기 위한 몇몇의 연출들이 극의 아쉬움을 극대화했다. 캐릭터의 복장은 과장되었고, 넘버들의 분위기 전환은 다소 갑작스럽게 진행된다. 어린이 극과 같은 통통 튀는 연출 아래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물들의 희생과 인간의 이기심, 라이카와 어린왕자의 과거 이야기와 내적 변화까지 너무도 다채롭기에, 관람객들이 극을 관람하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조금은 숨 가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무대연출과 고급스러운 출연진들의 품격 있는 연기, 극 곳곳에 있는 즐거운 유머와 중독성 있는 넘버까지 아쉬움을 넘어서는 장점은 확실하고 명확하다. 이번이 초연임을 감안했을 때,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가 다듬어진 후 그 미래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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