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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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가족들을 설득했다. 나가자고. 나가서 돌아다니자고. 나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오늘밖에 없으며, 여태 호주가 얼마나 평화로운지 느끼지 않았냐, 게다가 다녀도 밝고 밝은 시드니 시내만 다닐 거기 때문에 걱정할 게 하나 없다, 말했다. 집요한 내 설득보다 설득력 있었던 건 태양이었다. 오후 일곱 시인데도 해는 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작년 뉴욕에 갔을 때 길잡이 노릇에 도가 트였던(길 찾는 거에 재미를 느꼈다) 나는 곧바로 구글맵스에 들어가서 갈만한 곳을 찾았다. 호주는 밤늦게까지 운영하는 명소가 드물어 나는 밖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할 수 있는 곳들을 열심히 골랐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밑으로 쭉 내려가면 나오는 ‘하이드 파크’와 그 옆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 좀 더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시드니 시청’을 제안했다. 저화질의 사진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을 정도로 그곳들은 아름다웠다.


처음엔 돌아다니지 말자고 했던 엄마가 여기도 가면 어떨까? 하면서 ‘시드니 대학교’를 제안했다. 서울에 서울대학교가 있듯이 시드니에 시드니 대학교가 있는 건 정말 지당한 사실인데 나는 시드니에 시드니 대학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여기를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이미 대학생, 졸업에 가까운 대학생인데. 명문대에 넘어가는 그런 학생이 아닌데. 그러나 인터넷에 검색해서 몇몇 사진을 본 나는 가자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학구열 같은 건 모르겠고, 그냥 아름다웠다. 호그와트의 배경답게. 건물이 굉장히 유서 깊은 듯 보였다. 해리포터 팬은 아니지만, 그런 건축물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호주의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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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러 아주 가볍게 짐을 챙긴 채 우리는 맥쿼리 대학교 역으로 향했다. 전날 갔던 쇼핑몰에서 백 미터 정도만 더 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거기서 ‘M1’호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면 시드니 시내 한 가운데였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많은 충격을 받았듯이, 여기서도 지하철에서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뉴욕 지하철역의 지저분함, 현장감 넘치는 냄새와 달리 호주의 지하철역은 뭐랄까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곳으로, 커다란 우주선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천장이 굉장히 높아서 22세기의 벙커처럼 보였다. 당연히 냄새도 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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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내부도 깨끗했다. 눈이 편한 연두색과 청록색이 적절하게 칠해져 있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나라 지하철로 치면 노약자석이 있는 부근이 접이식 의자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 앉아 있던 한 청년이 휠체어를 밀며 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의자를 접고 자리를 비켜주는 게 참 보기 좋았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접이식 의자 근처에 붙어있는 봉을 붙잡고는 몸에 힘을 뺏다.

 

 

 

하이드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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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digal’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하나둘 불이 들어오는 빌딩들 사이, 그러니까 시내 한 가운데에 우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트를 비롯해 여러 가게가 보였고 시드니가 일상인 사람들이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투어를 돌며 강하게 느꼈던 관광객 의식에서 벗어나 산책 겸 이곳을 거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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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를 건너자 하이드 파크의 초록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 초입부터 이십 미터는 될 정도로 키가 크고 몸통이 두꺼운 나무들이 보였다. 도시 한 가운데인데도 불구하고 울창한 숲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건물보다 나무의 존재감이 강했는데, 건물들은 나무들과 경쟁할 생각이 없는 듯 무표정하게 공원 주변을 두르고 있어서 나름대로 조화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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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낀 하늘은 칙칙하다기보다는 웅장해서, 내가 마치 드넓은 공간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기분과 마음, 낭만과 몽롱함... 그런 게 뒤섞이는 여름이라 그런가, 여름의 노을은 웅장한 구름과 뒤섞여, 물에 황금색 물감을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주위를 황금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공원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돗자리도 없이 누워서 책을 읽거나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오로지 이 향기처럼 풍겨오는 황금빛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것인양,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몽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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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가운데에 난 큰길은 양편이 모두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숲속의 깊은 밤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낮과 밤을 가로지르듯이 큰길을 걸었다. 큰길 끝의 탁 트인 공간에는 따뜻한 색감으로 장식된 분수대가 있었고, 거기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음 목적지인 세인트 메리 대성당의 측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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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고딕 양식


 

대성당은 그 뒤의 낮은 건물들처럼 사암 특유의 따뜻한 색감에 유럽의 고딕 양식이 덧대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그 뒤의 낮은 건물들이 감옥이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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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대성당 앞으로 가 사진을 찍었다. 대성당 앞은 광장처럼 탁 트여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대성당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만 보아도 건물이 주는 압도감과 경건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높이 솟은 두 개의 첨탑과 하나하나 공예품처럼 보이는 선들과 창문의 무늬들이 해상도가 높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눈을 트이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대성당을 보다가, 어느 투어버스가 길가에 정차하고 관광객들이 우루루 내리는 걸 보고 이제 다음 목적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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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건물도 대성당처럼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시계탑이 있어서 누가 봐도 여긴 시청이구나, 싶었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는데, 그 푸른 색감과 시계탑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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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변은 하이드 파크와 다르게 시끌벅적했다. 트램이 지나다녀 유동 인구가 많았고 유동 인구가 많아서인지 걸인인 듯한 사람들이 비틀비틀 걸어다녔다. 어떤 사람은 웃통을 벗은 채 누구라도 자기와 엮였으면 싶어하는 것처럼 공을 사람들 앞으로 굴렸다. 내 앞으로 굴러오는 공을 보다가 여긴 좀 힘들겠군 싶어서 곧바로 주변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길에 도사리는 수많은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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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유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시드니 대학교는 M1호선에서 T9호선으로 갈아타서 걸어가야 했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방식이 나라마다 달라서 나는 잠시 긴장했지만, 다행히 놓치지 않고 탔다. T9호선의 지하철은 반지하와 반지상으로 된 2층짜리인 데다 좌석이 넓었다. 이런 점들이 새로워서 마음이 마냥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레드펀 역에서 내리고서부터 의문이, 의심이,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경로를 보았을 때, 숙소에서 곧장 시드니 대학교로 가는 게 길이 간단하고 직관적이었다. 하이드 파크와 대성당, 시드니 시청을 거쳐 시드니 대학교로 가는 경로는 그보다 좀 복잡했다. 물론 버스를 타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나, 버스 카드를 뽑고 하는 게 복잡했다. 또한 가려던 곳 중에서 시드니 대학이 제일 멀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호선을 갈아타서라도 시드니 대학까지 가기로 결심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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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내린 레드펀 역은 마감 10분 전의 대형 카페처럼 한산했다.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니 완전히 어두웠다. 상가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주거 구역이라면 안전하다고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들 안전한 집에 들어가 있으니 안전한 것이지, 여기에 집이 없는, 여기를 지나쳐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대는 가로등도 몇 없는 데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어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사진으로 본 그곳은 대학교 어디에 있는 걸까? 대학교가 워낙 넓어서, 어디로 가야 그 고풍스러운 건물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찾아볼 시간이 충분치 않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지도상으로 보이는 최단거리를 따라 빠르게 대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과 이렇게라도 가야 뭐라도 진전이 있을 거란 생각이 양쪽에서 나를 붙잡고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아니,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다간 대학교의 뒷문 같은 곳에 도착하는 건 아닐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대학교 근처, 그러니까 대학가라면 시끌벅적해야 하는데 이렇게 조용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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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대학교 이름이 붙은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부턴 어떻게든 사진으로 보았던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굳게 마음먹을 수 있었다. 가족들은 길잡이인 나를 묵묵히 따라왔다.

 

 

 

푸른 밤, 초록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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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말 열심히 걷고 걸어서 도착한 쿼드랭글 시계탑. 사진으로 본 그곳. 시계탑 건물은 그 안에 중정 같은 네모난 잔디밭을 품은 채, 양옆으로 길쭉하게 이어져서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이루는 구조였다. 시계탑 건물 앞엔 여러 갈래로 뻗은 돌길과 잔디밭이 있었고,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짙은 초록을 뽐내는 잔디밭과, 청명해진 밤하늘, 고딕 양식인 학교 건물을 보니 몇백 년 전의 유럽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동양인이니 잘못 온 듯한 느낌도 조금 들었지만, 어쨌거나 아름다웠다. 뭐랄까 배움의 기품이 이런 건가 싶었다. 밤하늘과 학교, 그리고 잔디밭.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그 세 요소만으로도 완벽해서, 거기에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보태지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감상하고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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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중정도 조금 살폈는데, 정말 그 안은 몇백 년 전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신기한 건 그 안을 향해 사진을 찍었더니 온통 초록빛이 덧칠되었다는 점이다. 그 초록빛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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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대학을 벗어날 때는 레드펀 역에서 대학교로 갔던 길과 완전히 반대쪽 길로 나갔다. 자연히 이 길이 정식인 길이란 걸 깨달았다. 넓었고 직관적이었으며 정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손님과는 다른 길로 가봤기에 여기서 더 많은 경험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자유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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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면서는 출출해져 편의점에 들렀다. 우리나라가 정말 수출 강국이 맞는 건지, 편의점 안에 우리나라 컵라면이 즐비했다. 반가운 마음에 하나 집어 들어 계산하고 보니까 젓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이때 처음으로 ‘영어 회화’란 걸 구사한 것 같은데) 젓가락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컵라면을 파는데 젓가락이 없다, 라. 가위가 필요해 가위를 샀는데 안전 포장이 되어 있어 뜯으려면 가위가 하나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헛웃음이 났다. 갑자기 젓가락을 구하고 말겠다는 집념이 생겼고, 가는 길에 보이는 마트와 편의점 몇 군데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구한 건 일회용 포크 숟가락. 정말, 젓가락이 없었다. 그러나 라면이란 건, 손가락으로 먹어도 맛있는 게 아닌가. 숙소로 돌아와 포크 숟가락으로 먹은 그 컵라면은 자유가 선사하는 감칠맛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매운 고초를 두루 갖춘 훌륭한 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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