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 매일 새로운 콘텐츠들이 올라오는 OTT, 빠르고 자극적인 유튜브 등 우리가 즐길 거리는 너무나 많다. 이러한 시대에 멈춰 있는 것만 같은 미술은 과연 어떤 쓸모를 지니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미술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감상의 심리학]은 미술의 쓸모를 작가의 측면이 아닌 감상자의 입장에서 분석한다. 작품에 담긴 역사적 의미나 미술사적 의미, 기법의 발전 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감상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석한 이 책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작가와 미술사를 살펴보다 보면 가끔 이 모든 것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나와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오로지 감상하는 나의 입장에서 나의 심리를 다룬 책이기 때문에 미술의 쓸모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입장에서 미술은 왜 필요한 것인가?
미술 감상은 왜 필요한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의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학에서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몸의 주인이며, 감각과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주체’라는 느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자기이다. … 즉, “나는 감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10p.
우리는 생각보다 감정을 온전히 느낄 일이 많지 않다. 일상에서 감정은 해소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남아있다. 감정에 지배되면 일이 지연된다고 느끼고, 얼른 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 작품에서 감정은 추구된다. 감정을 느끼기 위해 예술작품을 보고, 그것은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머물러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감상할 때는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책에서 말한 대로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며, 자아를 자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상매체나 노래 등에서도 감정은 추구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또다시, 미술의 쓸모는 무엇일까?
책의 77페이지에서도 언급하듯이, 정보량이 증가하면 감상자의 의도가 개입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는 영상매체나 대중매체들은 대부분 정보량이 많다. 정보를 주입하고,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예술작품은 정보량이 적은 편이다. 예술가들은 감상자들이 단번에 모든 것을 알기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감상자들도 동일하다. 단번에 알 것 같은 그림은 매력이 없다. 감상자들은 긴장과 비대칭, 낯설게 하는 그림에 시선을 더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적은 정보량으로 새로운 장면을 만들며, 감상자는 그 비워진 부분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채워가야 한다. 한마디로 예술감상은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 ‘생각’은 감정처럼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한, 예술작품 자체에도 감상자의 생각은 중요하게 기능한다.
가장 유명한 현대 미술인 마르셀 뒤샹의 [샘]을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기성품에 불과한 변기는 누군가에게 능동적으로 해석될 때 비로소 기성품이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예술품으로 완성된다. 어떻게 보면 미술사 최초로 관객을 배려한 작품이다” 323-324p.
예술작품에서 감상자의 ‘생각’은 기성품을 예술품으로 완성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감상자는 그저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탄생시키는 사람이다. 특히나 현대 미술로 갈수록 작가들은 감상자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며 정보량을 줄이기도 한다. 비어있는 정보를 채우는 감상자의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고, 뒤샹의 작품처럼 감상자가 생각하기 전까진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
감상자의 생각은 작품을 만들고 없앨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책에서 지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선을 거두는 것이다. 작품 세계는 우리가 그에 알맞은 시선을 가지고 다가가야 더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책에서 말한 시선 중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몇 개 소개해 보려 한다.
52페이지에선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대 회화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종종 색이 형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작가는 말의 형태를 빌어 파란색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말 형태의 파란색’을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52p.
Franz Marc, blue horse 1, 1911
우리는 보통 형태를 중요시하고, 색은 부수적인 차원으로 여긴다. 하지만, 색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이 있고, 그것의 힘이 있다. 예술가들은 이것을 포착하고 그림으로 옮긴다. 색의 힘을 강조한 대표적인 작가는 마크 로스코일 것이다.
Mark Rothko, Yellow over Purples, 1956
책의 169페이지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로스코는 색이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감정을 불러오는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형태가 아닌 색의 능동성과 감정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작가가 그 색을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실세계의 색깔과 다르다면, 그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진실한 거짓’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작가가 특정 형태가 특정 색을 과장되게 그렸을 때는, 실세계에서는 거짓이라 해도, 작가는 그것을 강조할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형태나 색을 과장되게 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언제나 과장을 사용한다. 147페이지에서는 작가가 무언가를 그리기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주제에 대한 과장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작가가 무엇을 과장했는지, 그 안에 있는 작가의 의도와 진실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것도 감상에 매우 유의미하다.
323페이지에 등장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도 이러한 측면에서 감상할 수 있다.
René Magritte, The Empire of Light, 1953
실세계에서는 낮과 밤이 공존할 수 없으므로 거짓이자 과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작가가 이렇게 그렸는지 고민하다 보면 진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같은 장소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누구는 죽을 위기에 처하고 누군가는 날아갈 듯이 행복하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 같은 곳에서 어린이들은 어린 시절을 살고, 노인은 노년기를 살아간다.
감상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시선을 거두고, 아래에 있던 것을 위로 끌어올리거나, 내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할 때 새로운 감상을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