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다.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직 춥긴 해도 봄은 봄이고 달력을 보면 3월이다. 이번 3월, 나는 두 번째 대학에 입학했고 내 나이는 스물보다 서른에 가깝다. 스무 살과 첫 번째의 막연한 설렘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비루했던 사자성어만 떠오를 뿐이다. 그중에 하필 일장춘몽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적당히 삭은 얼굴과 적당히 유행 지난 청바지를 입는다. 맨들맨들 새 가방 대신 너덜너덜 헌 가방을 메고 음료 대신 오백미리 깡생수를 꼴깍꼴깍 들이킨다. 등교보다 출근에 가까운 비주얼이, 개탄스럽게도 내 현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면도를 했고, 어제 아침에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써봤지만 스무 살 상큼이에 필적하자니 얼척이 없는 꼴이다. 대충 둘러봐도 여기서 옷은 내가 제일 두꺼운데 유독 나만 추운 느낌이다.
강의실에 학생이 하나 둘 들어오고 교수가 들어온다. 간단한 상견례 뒤 수업이 시작된다. 단언컨대, (시각적으로) 강의실에서 내가 제일 열심이다. 노트북과 태블릿을 켜 쓱싹쓱싹 적고 그리는 학생들과 달리 나는 수제 100% 수기다. 예순 넘은 만학도도 아닌데 왜인지 모를 강박에 수기를 고집한다. 열심히, 라는 겉모습과 달리 대학 수업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분명 한큐에 알아들었던 말도 몇 번 해석을 거처야 기억에 남는다. 잘 해야 한다는 강박과 별개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은 그렇게 기생한다. 그러다 보니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한다. 나의두 번째가 일장춘몽일지 모른다.
두 번째라서 더 잘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첫 번째만큼 두 번째도 생경하다. 저기 저 스무 살 친구들은 나를 대단한 어른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대단한 어른치고는 오늘도 돈까스와 제육 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죽쳤다. 두 번째라는 건, 그렇게 두 번째가 되었을 때 그 적확한 뜻을 알게 된다.
두 번째, 는 전문가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번째’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형용사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몇 가지 진실을 알게 된다. 기회는 무한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되돌릴 때는 그만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진실 또한 알게 된다. 두 번째는 기회의 유한함과 기회비용의 커다람을 알게 된 대가로 불안하다. 두 번째는 세 번째가 불안하고 세 번째는 네 번째가 불안하다.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은 실제 화폐와 같아서 저마다 한계가 분명하다. 대학을 두 번 간들, 결혼을 세 번 한들, 이직을 네 번 한들 불안할 뿐이다. 전문가가 아니다.
두발자전거를 두 번째로 탄 날을 떠올려 본다. 얼떨결에 성공했던 두발자전거 첫 주행에 자신만만히 첫발을 내디딘다. 십 미터쯤 갔나 드르륵 긁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맙소사 스탠드를 올리지 않았다. 저 멀리 킥킥대는 친구들 비웃음에 식은땀이 뻘뻘 난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니 무섭고 약하게 밟으니 자전거가 휘청인다. 기어 변속을 못해 오르막은 헥헥대고 내리막은 아찔하다. 오늘보다 나았던 첫 번째 주행을 떠올리며 일장춘몽을 떠올린다.
저 멀리 쌩쌩 달리는 자전거 동호회에 경외감을 느끼고, 운동신경 하나 없는 우리 엄마 시범 주행에 박탈감을 느낀다. 두 번째 주행 이후 세번째 주행이 불안하고 네 번째 주행이 불안하다. 포기하자니 보조 바퀴는 이미 쓰레기통으로 간 지 오래다. 불안해도 별 수 있나, 다시 초보의 마음으로 두발자전거를 내디딘다. 그렇다. 중요한 건, 초보의 마음이다.
두 번째, 라서 불안한 것을 떠올려 본다. 내 나이에 대학 입학이 현명한 선택일까. 내가 선택한 전공을 나는 잘할 수 있을까. 강의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까. 스무 살 친구들에 녹아들 수 있을까. 졸업 후에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제 나이 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거창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거창한 이야기는 대부분 우문이다. 현답은 없다.
이런저런 우문을 팽개치고 초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오늘까지 해야 할 공부와 이번 주까지 내야 할 레포트를 정리해 본다. 제법 품이 많이 들어갈 모양새다. 두발자전거 첫발을 내딛듯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한다. 이제 막 두발자전거를 내디디면서 외발자전거를 기대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웃긴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다.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장춘몽이 가리켰던 건, 아무래도 불안이었던 모양새다. 불안하다는 이유로 우문을 품고 현답을 찾으려는 과정은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과 같다. 한바탕의 봄꿈을 꾸었으니 이제 다시 페달을 밟을 차례다. 보조 바퀴는 이미 쓰레기통으로 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