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작품이 무대 위로 쏟아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인물들의 실루엣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작됐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로 5톤 가량의 물이 실제로 쏟아지는 그 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연극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막다른 길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 사람일까. 어느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그가 믿어온 신념에 금이 가는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들을 이해하고 싶어 그간 문학을 공부하고 소설를 읽어왔지만 그것이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뛰어난 배우들과 함께라면 연극은 텍스트보다 훨씬 더 적나라해질 수 있다. 특히 이날처럼 110분에 걸쳐 인간이 무너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장면을 봐야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삶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말하자면 비극은 인생의 필요조건이다. 비극이 곧 인생이라거나 인생은 비극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인생에 비극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도 비극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쉽게 잊으며 자신에게 그것이 다가왔을 때 속수무책이 된다.
사실 비극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삶이란 웅덩이가 여기저기 패여있는 험한 산지를 눈을 감고 걷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언제든 한 번쯤은 넘어지게 돼있다. 인생에서 구덩이로 끌려들어가는 건 불가항력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안전한 곳(서사)에서 위험한 것(비극)을 여러번 경험해보는 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건 비극을 우리를 빗겨나가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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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작품 속 만선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이상이나 꿈이었다면, 그래서 이 연극이 마치 돈키호테 스토리의 변주와 같은 것이었다면 이토록 마음이 착잡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그것은 현실 저편에 놓인 것이 아니라 현실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생생한 고통이었다. 이들에게 만선은 정체성이고 희망이며 불안이자 강요된 현실이다.
곰치에게 바다와 물고기잡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선친으로부터 내려온 자신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자 삶의 목적 그 자체다. 그는 이미 세명의 자식을 바다에서 잃었으며 기어코 넷째 아들 도삼이까지 풍랑에 떠나보내고도 마지막 남은 갓난아이를 보고 10살만 되면 그물을 손질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배가 뒤집히는 폭풍에도 만선할 물고기떼만 보이면 쌍돛을 펼치고 쫓아가는 게 그의 삶인 것이다.
구포댁에게 만선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희망이기도 하지만 이미 세명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바다로 자식을 또다시 보내야하는 불안이다. 그녀는 배가 출항할 때마다 다시 아들을 잃을까 마음이 선득선득해진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물질은 현실의 문제와도 지독히 엮여있어 쉽게 멈출 수가 없다. 당장 빌려간 돈을 갚지 않으면 배도 빌려주지 않고 집도 몰수하겠다며 임제순(악덕 주인)이 압박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단순한 생계의 수단을 넘어 끔찍한 현실이자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인 것이다.
임제순의 똘마니인 범쇠는 빚을 갚을 돈을 지불하고 슬슬이(곰치와 구포댁의 딸)와 혼인하겠다고 하지만 범쇠는 이미 색시가 셋이다. 또 슬슬이는 동네 청년 연철과 사랑에 빠져있어 나이 많은 그에게 시집을 가고싶을 리 만무하다.
이제 이들은 각자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배를 타야한다. 곰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연철과 도삼을 돈을 갚기 위해 배를 탄다. 그것도 몇십년만에 근해에 물고기가 가득 들어찼는데 임제순이 배를 안 빌려주겠다고 나서자 전 재산을 압류당하는 불공정 계약서에 지장을 찍고서야 겨우 말이다.
슬슬이는 범쇠에게 팔려가지 않으려면 만선이기를 바라야 하고 구포댁은 배를 태우면 아들을 잃고 그러지 않도록 막으면 슬슬이를 범쇠에게 보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 뒤는 관객이 예측하는 대로 흘러간다. 하필이면 그날 폭풍우가 오고 물고기떼를 쫓던 우리 주인공들의 배는 쌍돛을 달고 물고기를 쫓아가 결국 만선을 해냈으나 이내 배가 뒤집혀 바다에 삼켜진다. 곰치만 겨우 구조돼 살아돌아오지만 도삼도 연철도 결국 바다에서 죽어버린다.
구포댁은 미쳐버리고 더 이상 갈곳없는 슬슬이는 돈을 갚아준다며 겁탈하려던 범쇠를 돌로 찍어죽이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도 곰치가 갓난아이가 크면 배를 태우겠다며 만선에만 집착하고 구포백은 실성해 아이를 배에 띄워보내고 슬슬이는 목을 멘다. 곰치와 구포댁은 무대에 남아 쏟아지는 폭풍우를 맞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특히 연극이라면 더욱 그렇지만 연극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같은 서사라도 연극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주진 않았을테고, 극장이 아니었다면 도망치지 않고 이 이야기를 한 숨에 온전히 보기도 어려울테니 말이다. 극장에 가는 건 우리가 외면하거나 쉽게 포기하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물리적·시간적으로 스스로를 자리에 묶어두는 일이다.
극장에 들어서면 기울어진 무대가 위태로운 불안감과 함께 관객들을 맞이한다. 그 위태함은 시간에 걸쳐 서사를 통해 구체화되며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는 고전이라 불릴만한 힘이 있다. 이 작품이 오래된 전라도 방언으로 진행되는 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표현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연극을 예매하기 전에 마음에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방언으로 진행되는 오래된 서사가 꿈틀거리며 한 발씩 나락으로 향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끝에는 분명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쏟아지는 폭풍우의 형태라 할지라도 말이다. 극장이 아니라면 또 어디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이 글을 닫으며 희망과 절망과 현실과 꿈이 가득한 그 부둣가에서 빠져나온다.
어떤 의미로든 당신의 배에도 만선이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