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미셀 앙리 초상화
미셀앙리는 1928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전세계에서 ‘행복한 화가’로 이름을 날린 화가입니다.
사실 화가이지만 동시에 프랑스에서 원예협회 회장까지 역임하는 등 꽃에 대한 사랑도 대단했기에, 미셀 앙리의 작품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7년 미셀 앙리는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만난 외젠 나르본 교수는 미셀 앙리에게 건축적인 구도의 미적 엄격함을 가르쳐 주었고, 이 영향으로 미셀 앙리의 그림은 항상 ‘꽃-창가틀-풍경’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틀리에에서 미셀앙리는 그로테스크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로 유명한 ‘베르나르 뷔페’와 만나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당시에는 세계 2차대전 등 전쟁으로 인해 우울감과 슬픔이 감돌던 시기였고, 비평가들은 ‘어두움과 슬픔을 잘 표현해야 좋은 화가’라고 평했습니다. 따라서 ‘소녀 키키’, ‘어느 화가의 초상’, ‘나비’,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광대’, ‘에코르셰’ 등과 어두운 분위기의 삽화를 주로 그린 베르나르 뷔페는 매우 유명했습니다. 반면 미셀 앙리는 아름다운 꽃과 고향의 풍경 등을 그렸기에 비평가들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습니다.
미셀 앙리도 전쟁에 반대하며, 희생자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 표현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모습을 보며, 사람의 삶도 순간의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셀 앙리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는 대신 그 순간 찰나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입니다.
비평가들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만의 색채와 그림체를 고수한 미셀 앙리는 1955년 졸업 직후, 20대의 나이에 이미 화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운 상들을 모두 받으며 미술계 엘리트로 성장해갔습니다. ‘메종 데카르트 상’을 받아 네덜란드 국비 장학생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유학하기도 하고, 스페인에서도 ‘카사 드 벨라스케스 상’을 받으면서 마드리드에서 유학하기도 했습니다.
미셀 앙리의 그림은 규칙을 깨면서도 잘 어울리는 색채로 유명합니다. 이는 새플랭 미디 교수로부터, 선의 유연함과 명확함, 색의 조화, 감수성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셀 앙리는 꽃의 색채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색의 조화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는, 색가(Valuer)라는 개념으로 인해, 붉은색은 배경으로 잘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셀앙리는 과감히 붉은색을 배경으로 붉은 장미 등을 배치하였습니다. 이것이 'The Red'시리즈입니다.
세계적 미술품 경매처 “아트시(Artsy)”에서 미셀앙리의 다른 그림들이 2-300만 원대에 팔렸다면, 붉은 배경의 ‘프랑스의 아네모네(Anemone of France)’라는 작품은 6-700만 원에 거래되었음을 볼 때 그 인기를 알 수 있습니다. ‘The red’시리즈 중 한 작품의 이름은 ’자부심의 잔‘으로 붉은 배경에 아름다운 잔과 장미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마 미셀 앙리는 나름대로 ’통상 규칙‘은 깨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은 세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림] 파트리시오의 창가에서
위 그림 ’파트리시오의 창가‘를 보면, 궁전 건물이 그림자로 처리되어 있고, 밝고 푸른색이 배경을 채우고 있으며, 다홍색 꽃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창가에 꽃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지만, 미셀 앙리는 자신이 크로키를 절대 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눈으로 메모한 후 사람들에게 잔하고 싶은 아름다운 배경에, 상상 속의 꽃병을 배치한다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고향을 배경으로, 때로는 유학힜을 당시 보았던 프랑스 파리나 네덜란드 암스케르담 등을 배경으로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보고 그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