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는 2010년 개봉 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가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행한 숭고한 희생과 예술의 미학을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서사를 통해 집중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자’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인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꽃무늬 옷을 챙겨입는 그녀의 마음속엔 소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살아있다. 이런 미자의 주변에는 그녀를 다른 명칭으로 명명하며 이용하는 사람들뿐이다. 이혼 후 아이를 맡기고 부산으로 떠난 딸에게는 ‘엄마’로, 밥만 달라는 손자 종욱에게는 ‘할머니’로, 직장에서는 ‘파출부 아줌마’로.
그녀가 ‘미자’라는 자아를 찾을 수 있는 행위는 바로 '시를 쓰는 일'이다. ‘시’에는 오로지 미자의 생각만이 담겨 있고, ‘누구의 무엇’이 아닌 온전한 이름 '미자'를 써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시를 쓰기 위해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시 클래스에 참여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만의 시를 쓰기 위해 시상이 될 만한 아름다움을 찾아다닌다.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중 자신의 손자가 같은 반 여학생에게 성폭행을 가했으며, 가해를 당한 피해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한 합의금은 총 500만 원. 평생을 죄 없이 살아왔던 그녀는 죽은 여학생을 기리는 성당에 들어가 여학생의 사진을 훔치고, 이불 속에 숨어버린 손자에게 ‘왜 그랬냐’며 울분을 토하는 등 받아드리기 힘든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설상가상으로 일을 하는 집의 주인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한 번만 성관계를 해 달라 요구하고, 병원에서 치매 판정까지 받게 된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미자는 시 낭송회에 참석하고 꾸준히 시상을 찾는 등 시의 미학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미자는 자신이 바라던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아파트 공터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손자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너무나도 해맑아 보였기 때문이다. 파출부 일을 하는 집에 다시 방문한 그녀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후 몸을 닦는, 즉 과오를 씻는 장소로 사용되는 '욕실'에서 할아버지와 성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500만 원을 받아낸다. 불경한 일을 통해 받아낸 돈은 전부 손자의 합의금으로 사용된다.
영화는 미자가 자신이 쓴 시 ‘아네스의 노래’ 원고와 꽃다발을 시 클래스 선생님의 책상에 몰래 두고 도망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래는 시 '아네스의 노래'의 원문이다.
아네스의 노래
양미자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녘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아네스의 노래’는 아름다웠던 시절과 그 시절에 남아있는 당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당신’은 과거의 미자이며, 시 속 화자는 모든 일을 끝낸 현재의 미자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녀가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행위라고 여겼던 ‘시’를 통해 타락해 버린 자신의 죄를 고해하려 한 것이다.
성녀 아그네스는 기독교의 전설적인 성녀이자 여러 고난에도 끝까지 순결을 지킨 여성이다. 하지만 신화와 현실은 다르다. 신화 속에서는 여러 환상적인 일들이 성녀를 지켜주지만, 성녀처럼 살고 싶었던 영화 속 주인공 ‘미자’가 살아가는 현실은 안타깝게도 냉랭하고 가차 없다.
즉, 영화는 ‘시의 의미’와 ‘시를 쓰는 행위’가 주인공에게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반복되는 희생으로 인해 ‘미자’라는 인물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가족애와 모성애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폭력의 이면을 그려내고 있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와 비슷하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를 좇는 문학은 때때로 불행에 기생하여 탄생한다. 영원한 불행에서 기인한 아네스의 노래는 영원히, 그녀의 희생을 엿본 우리의 가슴 속에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