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서 또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울린다. 하루살이 인생, 오늘도 당장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 급하게 이전에 저장한 사진 중 일부를 지운다. 재작년에 128GB 핸드폰으로 바꾸면서 전보다 여유 있게 용량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폰 용량이 커져도 사진과 영상을 찍고 저장하는 나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요즘도 메모리 부족의 압박 속에서 살고 있다.
메모리가 부족해지고 있다는 건 사실 이미 여러 징조를 통해 알고 있었다. 먼저 폰에 설치되어 있던 앱들이 '사용하지 않는 앱'으로 분류되어 어느 날 갑자기 작동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보통은 평소에 쓰지 않던 앱들에 일어나는 일이라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위젯으로 일부 주요한 역할을 하던 앱이라면 위젯이 검은 바탕이 되면서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용량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 되면 사진이 삭제되지 않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겪는 메모리 부족의 경험은 비단 핸드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매한 패드, 노트북 그리고 노트북의 메모리를 보충하기 위한 SD 카드도 어느새 포화 상태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내가 촬영한 사진, 영상과 소장하고 싶어서 파일로 구매한 영화, 드라마, 음악으로 가득 차고 사용 가능한 공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패드와 노트북도 핸드폰과 마찬가지로 용량이 부족해지면 작동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알아차렸을 때 신속하게 조치하는 게 중요하다.
앱이 작동을 멈추거나, 오작동하고, 빨간 불빛으로 표시해서 전자기기들은 메모리 부족을 확실하게 상태를 드러내지만, 만약 사람이 메모리 부족을 경험한다면 눈에 띄는 분명한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사람이 메모리 부족을 경험? 그렇다.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다. 저장 공간을 지닌 전자기기들처럼 사람도 정보와 감정의 포화를 겪는 메모리 부족 현상을 겪는다. 나의 머리와 마음은 현재 경고음 없이 용량의 한도를 초과했다.
메모리 부족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 나에게도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머릿속 용량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기억된 것이 너무 많아서 새로 입력되는 약속된 중요한 할 일을 잊는 일이 잦아진다. 그럴 땐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잃거나 귀하게 찾아온 기회를 잃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마음 용량이 가득 차 삶의 여유가 없어지면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함께 있는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에 타인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난 지금 메모리가 가득 차 정보 습득에 둔해졌다. 새로 추가되는 정보들은 기존에 있던 뭔지 모를 정보를 튕겨내고 그 자리에 안착한다. 예상치 못하고 자리를 뺏긴 정보는 가끔은 잘 꺼내보지 않는 자료이기도, 가끔은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자료기도 하다. 튕겨 나가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삭제하고 싶은 자료를 지정해서 지울 수 있는 컴퓨터와 달리 머릿속 자료는 무작위로 지워진다.
유약한 사람이라 메모리 부족 상황을 최근 몇 년간 반복해서 겪었다. 여유 공간이 없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또 하루살이처럼 넘기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대로 불안한 상태를 지속할 수 없었기에 떠올린 나름의 방안은 이런 것이다. ① 돈 내고 이동식 메모리를 구매한다. ② 보관될 필요 없는 자료들을 지운다. ③ 쓸데없는 자료들은 보관하지 않는다. 이건 전자기기 메모리에도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해결책이다.
*** 2022.02.26 기록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4년 넘는 시간 동안 기고하면서 소중하게 남은 것들이 많다. 이곳에 있는 글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존재한다. 보통 사이트에 글을 옮기기 전에 초고를 다른 곳에 작성한 후 옮겨 적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그러다 보면 기고한 글만큼 초고로 쌓인 소재와 짧은 글들이 어느새 가득 쌓여있다. 작곡가들에게 세상에 내놓지 않은 미공개 곡처럼 미공개 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설레는 일이다.
미공개가 미공개로 남은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글’의 형태로 담기에 아직 문장이 완성하기 어렵거나, 너무 날 것의 단어들로 채워진 문장들을 사람들에게 보이기에 부끄럽기 때문이다. 위에 적힌 3년 전에 작성한 글의 일부는 후자에 속한다. 사실 ‘글’이라고 우길 만큼 충분한 양의 내용을 담았으나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한 내면이 투영되어 길이 들지 않은 표현을 감히 내보일 수 없었다.
여전히 메모리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고, 글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빙빙 도는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묻어두었다. 3년이 지나고 비로소 핸드폰과 패드 그리고 노트북의 메모리가 여유로워졌다. 재밌게도 물리적인 메모리 여유 공간을 확보하자 마음의 여유도 찾았다. 특히 핸드폰 메모리가 처음 핸드폰을 샀던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으로 20GB 이상 비었더니 새롭게 삶에 적용해보고 싶은 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장 공간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하나의 메모리에 50개 넘는 앱들이 나눠서 사용하는데 비중은 천차만별이다. 앱 자체의 크기가 400MB가 넘는 것도 있고, 자체 크기는 1MB도 되지 않지만 담고 있는 데이터양이 수십 GB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핸드폰에서 '사용하지 않는 앱'은 많은 경우 정리가 된다고 용량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앱들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앱을 아예 삭제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필요한 상황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진 찍다가 용량 부족 이슈로 못 찍는 시간을 보내던 나는 사용할 수 있는 메모리를 얻기 위해 돈을 내기 시작했다. 매달 고정 지불 금액을 올라갔지만, 삶의 질 또한 상승했기에 전혀 후회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삭제하지 못해서 생각한 궁여지책임을 인정한다. 메모리 부족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 다시 전자기기가 버벅대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우선은 이렇게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게 나에게 간절했다.
빛나는 현재를 기록하기 위해 찍은 사진과 영상들은 시간이 지나 애물단지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이제는 빛나던 과거가 되어버린 자료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는 일시적으로 얻은 평화로운 여유 가운데 찾아야 할 숙제이다.
정보가 풍부한 21세기에 발견된 새로운 시련은 나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들에게 넘어야 할 산이다. 우리는 내일 더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어떤 건 현재 있는 정보보다 귀하고, 어떤 건 빠르게 스쳐 지나갈 정도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인생에 필요한 정보가 들어올지 모르니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