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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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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


 

‘마음’이란 어떤 경로로 생겨나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걸까. 내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혹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 ‘내 마음’을 이룬다고 할 때, 좀더 은밀하고, 까탈스럽고, 사사로운 마음을 만드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생각으로 품고 있던 말. 신속히 입 밖으로 털어낸 말이 아니라,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슴에 묻어둔 말. 그런 말들은 낱낱의 씨앗이 되어 내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자라나며 한 사람의 내밀한 마음을 형성한다.

 

모든 사람은 서로 저마다의 마음을 가진 타인이라고 할 때, 이러한 타인들이 모여 부대끼며 살아가는 집단이 ‘가족’이다. 나와 다른 개체가 나와 닮은 눈, 코, 입을 가지고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것도 가족의 일이지만, 이토록 닮은 우리가 이렇게나 다른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불시에 확인하는 것 역시 가족의 일이다.

 

황정은의 연작소설에는 내밀한 마음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순일과 한영진과 한세진. 이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곧바로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말해야 하는지, 왜 말해야 하는지, 거듭하여 생각하다가 건네지 않기로 다짐한 말들. 그런 말들이 이 소설 속에 엉켜 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 이순일


 

이순일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지나온 “숱하고 징그러운” 삶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순일은 기억한다. 어릴 때 날아서 눈더미에 박힌 채 맛보았던 싸늘한 눈의 맛을, 토성리와 지경리 사람들이 자신을 순자라고 부르던 것을, 세 살짜리 동생을 등에 업고 배추밭을 기어가던 밤을, 외조부가 집을 비운 사이 동생의 치맛자락에 아궁이의 불이 옮겨붙던 장면을, 그 일로 사흘 만에 동생이 죽어버린 것을, 자신이 이웃집 순자의 뺨을 때렸을 때 울지 않던 순자의 얼굴을.

 

이순일은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통해 세상에는 차마 용서할 수 없고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외조부가 술에 취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순일을 가리키며 “다 죽고 저거 하나 남았”다고 말하던 것을 그는 용서할 수 없다. 노인에게 맡겨진 외손녀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으므로. 외조부는 그 일로 이순일을 탓한 적 없지만, 이순일은 노인 역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순일은 자신이 이웃집 순자의 뺨을 때린 일로 순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순자가 나오는 꿈을 꾼다. 이순일은 마음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상처나 미움, 그리고 죄책감은 용서하거나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편안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쉽게 홀가분해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 그 아픔이 자신의 내부를 자꾸만 찌르더라도 그 역시 자신의 몫이라고 믿고 감내하는 사람.

 

이순일은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로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바라서 자신의 역사를 발설하지 않고 성실하게 매일을 산다. 하지만 이순일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불행만 통제할 수 있을 뿐, 그 바깥에 있는 아이들의 개인적인 고충이나 사적인 감정까지 전부 헤아릴 수는 없다. 이순일은 자신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로 막연히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영진이 자신의 사라진 등산화를 찾던 날 이순일에게 “쓰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가져가서, 망가뜨리고, 버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한 딸의 말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문다. 이순일은 딸이 자신에게 끝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딸이 엄마를 용서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에 대해선 이순일 역시 용서를 구할 수 없으므로 묻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는 평생에 걸쳐 소화되지 않고, 소화할 수 없는 이야기는 마음에 묻어두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이순일은 안다.

 

 

 

억누르는 사람, 한영진


 

한영진은 억누르는 사람이다. 장녀 한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해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가 시장에서 어떻게 일하고 무엇을 먹고 마시며 돈을 버는지 목격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한영진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을 지침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는 백화점 9층에서 가장 매출이 높은 침구 매장을 담당하고 있을 만큼 유능하며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냉정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자격과 태도를 검열하는 한영진의 모습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도 두드러진다.

 

어느 날 출근길 전철에서 자신과 눈을 마주친 외국인이 한국어로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한영진은 “불쾌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남편 김원상에게 이 일화를 전달했을 때, 남편이 조롱하듯이 “Where is the toilet?”이라는 질문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 되묻자 한영진은 깨닫는다. 자신이 믿지 못한 건 외국인이 아닌 스스로라는 것을. 자신이 그토록 매력적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이 거북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도 엄마로서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그는 품에 안긴 아이의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를 “모성이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후천적으로 모성을 학습하고 형성한다.

 

한영진이 처음으로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 것은 동생 한세진의 작품을 올린 연극을 보러 갔을 때이다. ‘가정 실습’이라는 제목의 연극 무대 위에서 한영진은 그의 가족들을 본다. 그는 자기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연기하는 자신의 표정과 대사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고 민망하고 좀 부끄러운” 감정을 느낀다. 현실에서 표출하지 못한 억압된 감정들이 무대 위를 범람하는 것을 지켜보며 한영진은 “간질간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곤란”해한다. 한영진은 번번이 직장을 바꾸어 가며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는 한세진에게 “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가 위안을 얻는 것은 한세진이 만든 무대이다.

 

한영진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동생 한세진과 한만수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이순일은 뉴질랜드로 유학 간 막내 한만수에게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하지만, 한영진은 그가 왜 자신에겐 그렇게 말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늘 밥상 앞에 자신을 붙들어두는 이순일에게 실망과 분노를 품고 있지만, 한영진은 그에게 묻지 못한다. 그 말을 들은 엄마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으므로. 한영진은 이순일을 탓할 수 없다. 이미 자신도 엄마의 삶을 이해해버렸으므로. 매일 앞치마를 입고 하루를 시작해 자기 전에 앞치마를 벗는, 한영진과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는 늙은 엄마의 삶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영진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관찰하는 사람, 한세진


 

한세진은 관찰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순일이 외조부의 묘를 없애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나서는 성묫길에 동행하는 유일한 자식이다. 한영진과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고 하지만 한세진은 엄마에게 그 묘가 친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세진은 성묫길 산자락에서 만난 아까시나무 군락을 자세하게 살핀다. 이순일은 얇은 가지에 큼직하게 돋은 가시들을 보며 질색하지만, 한세진은 그것이 “어딘가 다른 차원과의 경계를 알리는 복잡한 무늬” 같다고 생각하며 아름답다고 여긴다. 한세진은 어떤 대상 안에 깃든 세계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사람,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미묘한 감정이나 뉘앙스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한세진의 시선은 가족 모임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한만수가 뉴질랜드에서 귀국했을 때, 그는 자신이 친해진 백인 할아버지가 이순일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도자기 접시와 금 팬던트, 그리고 노인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말하는 한만수의 어조에서 모욕감을 느낀다. 모성애를 신성화하는 듯한, 마치 그것이 이순일의 타고난 마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의 역할을 주변화하여 부각하는 그 말이 한세진은 불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세진은 남동생의 말에 일일이 반박함으로써 간극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한세진이 이순일의 성묫길에 동행한 일에 대해서 한만수가 영상통화로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을 때도, 한세진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한세진은 생각하지만 그런 마음을 고백하지 않는다. 한세진이 느낀 마음은 단순히 효라거나 자녀로서 갖는 모종의 책임감으로 치환될 순 없는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그보단 타인의 마음에 잘 감응하는, 그래서 자연스레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연민하고 사랑하는 감정에 가까울 것이다.

 

한세진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을 낱낱이 털어놓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존한다. 그것이 한세진이 마음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이다. 한영진이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지만 결국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뒤따르게 되는 인물이라면, 한세진은 앞 세대의 삶을 알면서도 새로운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한세진은 가족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남편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결혼은 선택지일 뿐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는 여자친구 하미영과 고양이와 함께 산다. 전형적인 삶의 형태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은 한세진에게 불안과 자유를 함께 준다.

 

 

 

실패하며 사랑하기


 

한 사람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영영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일에 가까울 때, ‘가족’이란 영원히 실패를 반복하는 관계일 것이다. 『연년세세』의 이순일, 한영진, 한세진은 실패를 거듭하며 각자 터득한 최선의 방식으로 서로의 삶을 돌본다.

 

이들의 마음 앞에 ‘사랑’을 덧붙여보면 어떨까. 사랑해서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해서 억누르는 마음, 사랑해서 관찰하는 마음. 마음을 쓰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모든 마음의 기저에는 서로가 행복하기를,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서로로 인해 실망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얼룩덜룩한 모든 흔적이 사랑의 모양일 것이다. 무결한 화해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들의 삶은 바쁘게 지나간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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