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한다. 어머니는 삼촌과 재혼한다. 삼촌이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수심에 불타 그를 죽이려다가 흠모하던 여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만다. 여인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면, 도저히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이 희곡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사건들은 소위 ‘도파민’의 시대라는 현대 사회가 양산하는 자극적 시퀀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햄릿>이 쓰인 지 400년이 넘었으니, 말하자면 이 작품이 도파민 문화의 원조 격인 셈.
도파민이 분비될 때 느끼는 감정은 행복감이거나 쾌감이다. 이 둘은 엄연히 구분되는 감정이므로, 어떤 작품을 보면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행복감 또는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수많은 비통과 죽음이 겹치므로 희곡 <햄릿>은 엄연한 비극이다.
햄릿의 고뇌와 고통을 목격하며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그것은 행복감의 분출일 수는 없으므로(적어도 그래서는 안 되므로), 쾌감의 발현일 테다. 이처럼 철저히 타자화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쾌감이다. 비록 쾌감의 대상은 깨져서 분열되고 있을지라도.
연극 <플레이위드 햄릿>을 본다.
햄릿이 무대 위를 돌아다닌다. 공연 시작 전부터 부산하게 뛰고 걷고 던지고 받고 방황하는, 네 명의 햄릿. 공연이 시작되면 죽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전한다. 동생 클로디어스가 자신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고. 이제는 자신의 아내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죽은 자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도 의심스럽지만, 죽은 자가 하는 말의 내용은 더 끔찍해 믿기 어렵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수화기 속에서 죽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햄릿은 분노하거나 의심하면서 분열된다. 아니 전화 이전부터 햄릿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으며, 이제는 그 분열의 상태가 확고히 고정되었을 뿐이다.
햄릿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심리를 병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말이다. 그러나 햄릿의 삶을 멀리서 지켜볼 뿐인 우리가 그의 고통과 고뇌를 섣부르게 정의할 수는 없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방식을 통해 알게 됐을 때, 그토록 거대한 비극이 순식간에 닥쳐왔을 때, 누군들 또렷하고 확실할 수 있을까.
연극 <플레이위드 햄릿>은 증후로서의 햄릿에 한결 섬세하고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햄릿은 단지 상처 입고 찢어진 존재이며, 고통을 분담해 감내하기 위해 네 명의 햄릿―들로 나뉘었다는 것.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한 사람이 것이 아닌, 적어도 네 인격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라는 것. 무대 위 네 명의 햄릿―들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다른 존재다.
“복수해다오.” 아버지가 남긴 이 무책임하며 위험한 전언이 햄릿을 위태롭게 갈라놓았으므로, 이 전언의 실현을 통해서만 햄릿은 다시 통합될 수 있을 테다. 고민 끝에 햄릿―들은 억울하게 죽은 선왕이 자신에게 남긴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햄릿―들은 여전히 고뇌한다. 복수를 해야 하나/하지 말아야 하나. 살려야 하나/죽여야 하나. 혹은 살아야 하나/죽어야 하나. 고통스러운 내면의 갈등 속에서 사랑도 우정도 멀어진다. 어머니는 무분별하고 연인은 죽는다. 햄릿의 삶에는 오직 햄릿―들만 남게 되는데(그래서 이 무대 위 배우들은 오직 네 사람이다), 아마도 햄릿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비극 속에서 혼자만 (아니 네 명의 자기 자신만) 남았다는 사실, 그 처절한 외로움처럼 보인다.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는 이야기는 결국 분열된 햄릿의 지난한 통합 과정이다. 그 오랜 고뇌와 방황의 끝에서 햄릿―들이 발견한 정답은 이것이다. “다 나 때문이구나.” 지켜본 우리에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닐 테지만(이 모든 비극은 삼촌 클로디어스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므로), 햄릿―들은 그들만의 진실을 믿기로 한다. 처절한 진실의 끝에서 햄릿―들은 무기 대신 악기를 집어 든다. 햄릿이 햄릿과 싸우는, 햄릿을 위한, 햄릿에 의한, 햄릿의 쇼.
그 마지막 공연에서 그들은 부른다. 엉망진창인 인생의 비가(悲歌)를. 이 무대 끝에 남은 건 처참이고 저열이고 처절이고 슬픔이다. 그것은 햄릿―들을 죽이는 동시에 우리의 피를 돌게 하는 뜨거운 도파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