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느냐는 말은 어느 때고 강렬한 충격이 된다. 전시관에 입장하자마자 크게 적혀 있는 이 질문은 순식간에 나를 어떤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어떠한 순간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고 매순간 잊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거짓은 있을지라도 침묵은 하지 않는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1942년부터 현재, 2024년까지 전세계 곳곳의 사건과 이야기와 마음을 담은 사진을 펼쳐낸다. 사진에 색이 들어오면서부터 현재로 성큼 다가온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코로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까지 펼쳐진 사진들이 새삼 내가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아직까지 보도되지 않아 '모르는 일'이 너무 많을 것이라는 점이 두렵다. 이번 전시에는 '네이팜탄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소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와 같은 '유명한' 사진들도 전시됐다.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당신은 저들을 구하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에도 가닿게 된다.
보도와 윤리는 대부분의 시기에 충돌해왔다. 참사 현장에서 유가족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비난받아 마땅했고(게 중 정말로 비난받을 질문도 많았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지도 늘 고민스럽다. 무엇을 찍고 무엇을 공개할지가 개인의 윤리 의식에 기대야 한다는 점은 매번 시험대에 올라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
이 사진은 언론고시에 그러니까 언론 입사 시험에 단골으로 등장했던 질문과 사진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마다 그 윤리의식의 옳고 그름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한 구획만 볼 뿐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알지 못한다.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은 작가 케빈 카터는 사진을 찍은 직후 소녀를 구했으며 이후 사회의 비난에 고통스러워 하다 퓰리처상 수상 후 3개월 뒤 자살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수단의 기근을 알리게 된 계기라는 점은 투명해지고 없다.
사진은 한자로 베낄 사(寫)에 참 진(眞)자를 쓴다. 카메라(camera)의 뜻은 '빛이 닿은 세상 모습을 담는 방'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빛이 비치는 모든 곳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빛이 든다면 숨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이 아름다워도 참혹해도. 사진이 사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상에 알려주는 퓰리처상의 지속을 응원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에디 애덤스는 이야기했다. 당신을 웃거나, 울거나, 가슴 아프게 한다면 제대로 된 사진입니다. 퓰리처 상은 역사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할 수도 없다. 그 고민들이 담긴 사진들 사이에서 나는 앞으로도 몇 개의 사진들이 이 상을 받을지 생각했다.
전시장 사진 촬영이 불가능한 것은 참 좋았다. 사진을 위한 사진전이 아니라 온전히 그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전시에 갔음'보다 전시를 온전히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 더 만들어지기 바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네'라고 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