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내 인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계속 글 쓰는 삶이었다. 글 좀 쓴다는 양반 십중팔구가 의례 그렇듯. 초등학생치고는 좀 쓴다는 이유로 글 쓰는 삶이 시작됐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군대도, 다른 건 못해도 글은 좀 쓴다며 글은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확실한 수단이었다. 글은 내 스스로가 비루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맡아주었다. 글은 내 자부심이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2월 8일 오후 11시 51분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글을 안 쓴지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간다. 글을 읽지 않은 지도 5개월이 다 되어간다. 돈 버느라 바빴다. 다른 말로 감 다 떨어졌다. 매주 마감으로 복잡하던 머릿속은 단순해졌지만,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라는 스티브 잡스의 철학과 달리. 나는 그저 그런 단무지로 변모했다. (단무지란, 단순 무식하고 지랄맞다. 정도의 은어로 협의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감만 발달하는 이 체험이 이제는 편안보다 불안에 가깝다. 글이 필요하다.
편집장에 기고 재개를 요청했다. 흔쾌한 수락과 달리 내 마음은 불편하다. 전처럼은 글을 쓸 수 없는 환경에서 그럴싸한 글을 쓸 수 있을 능력부터 미지수다. 호기로운 제목을 썼다가. 패기 있게 첫 문장을 끊었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멍때리고 물 마시고 화장실 한 번 갔다 자리를 고쳐 앉았다 누워봤다 걸어 다니다 카톡.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의 타이밍이 그것참 시의적절하다. 시험기간만 되면 깨끗해지던 내 책상과 육신이 오버랩된다. 아, 이건 뭔가 잘못됐다. 쓰레기는 쓰고 싶지 않은데, 내 손가락에서 나오는 문장 십중팔구가 쓰레기다. 이판사판 아사리판인데 개인 블로그에 올려뒀던 글을 편집장 몰래 스리슬쩍 복붙할까. 그래도 명색이 글 쓰는 사람이 가오 떨어지지 말자. 방구석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시간은 새벽이고 나는 곧 출근이다.
차분히 내가 썼던 글부터 되돌아본다. 마음에 드는 문장도 몇 있지만, 삭제하고픈 문장이 더 많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머 어쩜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잘 썼다며 올렸을까. 이런 나를 편집장은 왜 뽑았을까. 지나온 글은 형편없고 써야 할 글은 막막하다. 오래된 순서대로 글을 다시 읽어본다. 화끈거렸던 얼굴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최신 글일수록 지금의 나와 괴리가 줄어있다. 낯섦이 사그라든다. 내 글이 늘어있고 내 생각이 늘어있다.
글을 쓴다는 건, 퍼거슨의 말처럼 자발적 흑역사 생성과 유사하다. 걸작을 만들겠다는 욕심과 달리 형편없는 결과물에 낭비라는 현실감이 닥쳐온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 때야 내 글이 근사해 보이는 환상이 환상스러우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우고픈 전날의 주정과 주사로 변모한다. 그래서 글은 시작도 유지도 어렵다. 그러나 글은 쓸수록 는다. 써야만 는다. 부끄러움을 상쇄시키기 위해, 승부욕을 발동시켰기 때문에, 문제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어폐를 발견했기 때문에. 등등등.. 지나온 부끄러운 글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사유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에라 모르겠다 말하듯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적확히 말해 싸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적지 않은 분량을 채웠다. 몇 번 고쳐 쓰다 보면 제법 그럴싸해질 거 같기도 하다. 글 쓰는 리듬이 일말 돌아온 듯 반갑다.
걸작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으니 고통스럽던 마감이 잠시 즐겁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글 좀 쓴다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글 쓰는 게 처음부터 좋지만은 않았다. 시간에 쫓겨야 했고 팔도 아파야 했으며 깎아야 할 연필과 지금 당장 치워야 할 지우개 가루가 짜증 났다. 그래도 쓰다 보면 즐거웠다. 결국 이 큰 종이를 다 채웠다는 포만감과 글을 다시 쓰고 정리하며 느꼈던 시원함이 즐거웠다. 왠지 모를 우쭐함이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었다. 글 쓰는 삶은 언제나 막막했지만 언제나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은 어차어피 글 쓰는 삶이 됐다. 손재주도 수려한 미모도 갖추지 못한 나로서 글은, 여전히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확실한 수단이다. 여전히 내 인생에, 포만감과 시원함과 우쭐함을 주고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 준다. 비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맡아준다. 글은 내 자부심이자 최고의 놀이 수단이다. 글 쓰지 않는 삶이 참으로 지루하고 불안했다.
나를 지탱하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내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은 무엇인가. 내가 돌아갈 곳과 돌아올 곳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글 정도라, 그래서 내 인생은 어차어피 글 쓰는 삶이다. 어쩌다 보니 글 쓰는 삶이 계속되는 나의 삶이 나쁘지 않다. 나의 삶을 형용할 수 있는 ‘글’이 반갑다. 나의 화두는 돌고 돌아 다시 글이다. 여러분의 화두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