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에 입장하면 영상물이 먼저 나온다. 존 레논의 ‘Imagine’이 조용히 흐르며 이후 전시에서 만날 사진들을 하나둘씩 보여준다. 평화를 노래하는 이 곡은 정말 아름다운 가사를 가졌지만, 결국 이 아름다운 가사는 ‘상상’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참 아픈 가사다. ‘Imagine’으로 시작하는 이 전시에서 우리는 아름답지만 아픈, 아프지만 아름다운, 혹은 아프고 아픈 사진들을 만난다.
본격적인 전시는 시간 순서대로 구성된다. 194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긴 시간을 몇십 장의 순간들로 정리한다. 시대별로 주제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시대별 섹션에 들어가기 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세계적 사건을 말해주어 사진의 요점을 파악하기 좋다. 더군다나 모든 사진에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어 별도의 도슨트나 사전 정보 없이도 사진을 이해할 수 있다.
부끄럽지만 세계사를 거의 모르는 처지인지라 이런 자세한 이야기 덕에 전시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나 같은 사람이 나 외에도 많았는지, 각 사진에 설명이 적혀 있어 좋다고 말하는 다른 관람객과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동행을 종종 보았다.
가뜩이나 사랑받는 전시인데 주말에 방문했더니 사람이 워낙 많아, 실은 관람에 불편함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관람객들의 감상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는 독특한 경험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바로 위에서 말한 경우는 나와 의견이 같은 상황이라 공감의 재미를 느꼈지만, 한 번은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과 정확히 반대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어 놀란 적도 있다.
보통의 미술품 전시라면 작품의 제목을 가장 눈에 띄게 적고 그 아래 설명을 작게 적거나 생략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렇지 않았다. 기사 사진의 제목은 함축적이거나 깊은 의미가 있는 제목보다는, 단순 상황과 장소 설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 이목을 끄는 제목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 전시에서는 사진의 실제 제목은 가장 작게 적어두고, 대신 사진의 상황을 더 궁금하게 만들어줄 카피를 새로 만들어 제목처럼 붙여 두었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이 맘에 들지는 않았다. (이 전시의 문구 중에 그런 게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화제성을 위해 과하게 자극적인 문구를 일부러 뽑는 여러 매체가 떠올라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보러 왔다는 것은 이미 이 사진에 관심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일 텐데, 이 안에서도 또 관객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바로 옆에서 ‘제목이 재밌게 적혀 있어서 사진이 더 궁금해지고 기억에 남는다’는 말과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로운 제목의 의도가 정확히 그것이었을 테지. 생각해 보면 이 제목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나조차도, 그 문구가 있었기에 그 많은 사진의 그 많은 설명을 다 읽었던 것 같다.
다만 사진과 글의 순서가 반대였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사진의 오른쪽에 설명글이 있어 자연스럽게 사진보다 설명을 먼저 보게 되는데(특히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관람할 때) 그러다 보니 주객전도가 되어 사진이 아닌 글이 중심이 되는 듯했다. 사진을 보고 내 개인적인 감상을 가진 뒤 설명글을 읽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야기를 읽고 그 삽화를 훑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널리즘의 목적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면 그리 잘못된 배치는 아니겠지만, 사진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으면 싶다.
사진: Alamy Stock Photo
흑백으로 시작했던 사진들이 어느새 컬러가 되어 있었다. 사진전에서 훔쳐본 인류는 몇십 년 동안 반복해서 고통받는다. 웃다가도 또 운다. 진보하는구나 싶다가도 또 퇴보하는 듯한 그들을, 우리를 보고 있으면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이 힘들어 사진을 오래 보지 못하겠다는 다른 관람객의 목소리도 들었다. 전시실을 떠나는 내 발걸음도 가볍지는 않았다.
예술의전당에서 나와서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다음날 있을 독서모임 도서를 읽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개인적으로 책에는 실망했지만 제목은 참 멋있다. 원제도 정직하게 ‘Why Nations Fail’.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국가는, 인류는 왜 아직도 싸우고 무너지고 실패하는가. 우리는 왜.
사진: Alamy Stock Photo
오래전 인터넷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게임을 하는 어린아이의 핸드폰 화면에 ‘Fail’이 뜬다. 아직 영어를 모르는 아이에게 그 부모가 ‘Fail’의 뜻이 무엇인지 아냐 물어보자 아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Fail’은 ‘다시 하라’는 뜻이라고.
우리는 왜 다시 하는가, 왜 다시 일어서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불러야 하는 각자의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목적이자 수단이다. 노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같이 불러주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