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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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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2025, 캔버스에 유채

 

 

H에게

 

사고가 깊게 가지 않는 나날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변덕스럽고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한 모양새만은 또 아닙니다. 고요하고, 단조롭고, 올바른 궤도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어리광 뒤에 곧잘 매진하는 법을 잘 아니까요. 사실 조금 둔감해진 삶을 살고 있는 듯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현실이 지니는 무게가 있습니다. 제 분통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여전히 돌아갑니다. 너무 많이 낭비하고만 욕심들에 이만 세상에 항복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은 하나의 마음도 여러 개로 조각을 내는 방법을 얻었습니다. 좌표를 상정하는 것으로 존재를 증명하던 시절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갑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자꾸만 머리에 들이칩니다.

 

연결되고 단절되었던 시절을 지나오며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것들과 완충 공간을 두어야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언가와 깊게 가까워질 일이 앞으로 없을까 두려워질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냥 가능성일 뿐입니다. 상실이 두려워 지레 마음을 굳히는 것 또한 일종의 상실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너무 멀리 있는 슬픔을 끌어안고 있지 않겠습니다. 마음이 무거우면 발이 묶입니다.

 

요즘에는 상투성에 대한 고찰을 많이 합니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의식은 상투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요. 절실한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 방안을 시도해도 결국에는 진부함과 상투성을 재생산하는 일을 반복하는 듯합니다. 은폐되어 있는 부분을 파헤쳐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싶은 욕망은 여전합니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예술이지만 그 비가시적인 것 또한 어떠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제약된 범위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모든 것들을 위한 인내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이제는 상처받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서 과거와 마주 봐야겠습니다. 제 방향감각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에 가닿으리라 믿습니다. 다가올 봄의 저는 한결 더 무사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마음의 궤도 또한 유한하지만 무한히 반복되니까요.

 

성숙은 미숙을 깨닫는 과정이라던 당신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당신을 마주하면 변명을 쏟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로 대신합니다.

 

 

2025년 2월 1일.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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