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이 제 힘을 꼭꼭 숨기는 겨울.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고, 식물들은 조용히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인간은 어떨까. 필자의 경우, 겨울이면 평소보다 조용히 그간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 자연스레 그리 되는걸까. 고요함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곱씹어 본다.
삶을 돌아보는 행위 그 끝에는 쓴맛이 자주 입에 남는다. “bitter sweet”이라는 단어처럼 달큼한 게 삶이지 하면서, 긴긴 생각에 마침표를 찍곤 한다. 사유하는 삶은 좋다고 여겨지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때때로 독이다. 인생 전반에 관한 문제와 같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하면, 답을 찾으려 애쓰다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결국 수많은 고민들을 남긴 채, 생각은 막을 내린다.
얼마 전 만난 글 한 편이 문득 생각난다.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처하는 방식과 삶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었다. 타로에서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가 예상치 못한 행운과 불운 모두를 설명하는 것처럼,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강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다며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더불어 바퀴가 굴러 제자리로 돌아오고 난 다음 다시 출발할 때에는 조금 더 나은 궤적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도, 평탄하기만 할 수도 없다는 인생의 당연한 이치와 선한 목표를 세워 성실히 움직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이라는 걸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다.
살다 보면 나쁜 점을 빠르게 찾아내는 눈이 먼저 작동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장점을 먼저 보려 하고, ‘어떻게든 될 거고, 잘될 거야‘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아쉬운 점을 먼저 보다 보면, 자꾸 부족한 것들만 눈에 띄고 그 끝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남는다. 분명 좋다고 생각한 순간이 많았을 텐데 말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나머지 것들에 때를 묻히기 때문이다. 이윽고 “모든 게 의미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무기력과 공허함으로 귀결된다. 무기력은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간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면서 지금에 빛을 더하는 작업이다. 허나 무기력증에 빠지면 무언가를 하면서도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우리에게 다가온 빛나는 순간들이 서서히 빛을 잃는다. 세상 만사는 양면적이라는 사실을 까먹고, 현재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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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많은 것들이 우리를 거쳐간다. 시간, 사람, 장소, 물건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곁에 왔다가 떠난다. 삶에 영원한 것은 없다. 나도, 상대방도, 물건도 언제든 상태가 변할 수 있다.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더라도 전에 알던 것과는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삶은 만남과 상실의 수도 없는 반복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유한한 삶 속에서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지금 빛나는 것들을 잘 들여다 보고 오래오래 기억하며 그것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운명처럼 다가온 수많은 사건과 인연들을 생각할 때 조금 더 나은 쪽으로 믿는 연습이 현대인들에게는 필요하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삶에 대해 골몰하자,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그리고 가지게 될 것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삶의 모든 순간을 헛되이 흘려 보내지 마세요
: Hold or Let it go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의 저자 마이라 칼만은 1949년생으로, 작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디자이너로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이다.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책을 30권 이상 쓰고, 전 세계 미술관에서 전시를 여는 뉴요커 할머니다.
2022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최고의 아트북,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은 국내에 출간되는 마이라 칼만의 첫 도서다. 작가가 세상과 사람을 관찰하며, 그녀가 깨달은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을 만날 수 있다.
책은 무언가를 가진 여성들의 그림 86점과 그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성’이 삶에서 가졌던 순간들에 대하여 역사 속 그리고 일상에서 만나는 여성들을 강렬한 색감과 대담하고 단순한 붓터치의 일러스트와 명료한 글로 표현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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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과 내용에서 ‘갖는다(Hold)’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소유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살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아마도 살아 가면서 여성들이 “겪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여자들은 무얼 가지고 있나?
집과 가족. 아이들과 음식. 친구 관계. 일. 세상의 일. 인간다워지는 일.
기억들. 근심거리들과 슬픔들과 환희. 그리고 사랑.”
이것은 남성도 예외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도 그렇긴 하지만, 그닥 비슷한 방식은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여성과 남성이 채택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개개인의 기질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DNA에 내재되어 있는 뿌리깊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주로 여성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따뜻하고 너른 품, 느슨하지만 강한 연대와 같은 것이 아닐까. 마이라 칼만은 위트있는 그림체와 말로 이것을 전달한다.
또 그녀의 그림에서 여성은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타의에 의해 결정하는 연약한 모습이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여성만의 방식으로 삶을 직조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세상을 포용하는 모습이다. 여성 독자로 하여금, 여성의 연대를 상기시킨다.
이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특정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갖는다’는 것은 잠시 품에 안고 있던 시간을 의미한다. 왜 그녀는 우리가 삶에서 가진 것들에 주목했을까. 아마도 우리가 잊고 지낸 일상의 소중함과 수많은 선대 여성들의 오랜 노력으로 갖게 된 권리가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성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분노, 반대로 여성이기에 겪을 수 있었던 행복과 환희. 그 모든 순간들을 온전히 소화하여 멋진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갖는’다는 노력이라는 것을.
그런 점에서 저자의 말처럼 특정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은 근사한 일일 것이다. 이토록 긴 인생, 큰 세계에서 무언가가 내게 찾아온다는 것은 엄청난 확률의 일이고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무언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순간이든, 관계든 의지를 갖고 삶으로 초대하는 일은 주체성을 가지고 이뤄낸 사건이지 않을까. 설령 그것이 나도 모르는 새에 운명처럼 왔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갖는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기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자 선물인 것이다.
“모든 걸 갖는 건 힘든 일이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것을 가졌다가 기진맥진하고 낙담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이 차오를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누구든 어떤 날에든 그럴 수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면 다음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삶에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뜻은 언제든 잃을 각오를 한 채로 안는다는 뜻과 다름없음을 배웠다. 거의 동료나 다름없던 일터 근처에 살던 길 고양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세상 그 누구보다 다정했던 외할머니의 섬망으로 부정당하는 순간들을 겪고서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잔인한 시간이었다.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던 존재들이 한순간에 삶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도 언젠가 그들의 삶에서 없던 것처럼 지워진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들이 갑작스레 곁을 떠나거나 혹은 떠날 채비를 할 때, 할 수 있다는 게 없다는 사실은 무력감과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온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은 힘을 잃고 만다. 우리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매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후회없는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하는 것. 그것이 상실과 무기력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이라는 것을 아픔을 맞닥뜨리고서야 배울 수 있었다.
흘려 보내거나 붙잡음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삶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마이라 칼만이 하고 싶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당신의 삶에 찾아온 수많은 순간들 중에 붙잡아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므로 힘껏 안아 내 것으로 만들라는 이야기 말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여성으로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나서뿐만은 아니다. 여성 화자 혹은 작가가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글은 이미 많이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여느 작품에서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는 긴긴 위로의 말보다도 한 번의 포옹이 효과적이듯, 짧지만 확실한 표현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녀는 작지만 알찬 목소리로 여성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런 점에서 마이라 칼만의 책은 진한 포옹과도 같다.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담백한 목소리와 그림으로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따스함으로부터 우리는 특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얼핏 보았을 때에는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같은 자유로운 터치와 단순하지만 강렬한 색감의 삽화와 짧은 문장의 시너지가 주는 메시지는 두 가지의 합 이상이었다. 그림책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형태로 쉽고 명료하게 독자들 곁으로 다가간 뒤 사소하지만 커다란 위안을 내어준다. 누구나 보기 편한 방식으로 뜻을 전달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책이 훨씬 대단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Be not afraid. (두려워 마세요)
~
Hold on. (꼭 버티세요)
위의 문장은 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말이다. 책을 읽는 모든 순간 동안, 여성들에게 힘있는 목소리로 삶이라는 긴 여정을 응원하는 책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쥐고 있는 것이 독이 될 때에는 흘려 보내고, 잃지 말아야 할 순간은 꼭 붙들고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아름다운 그림과 울림 가득한 문장을 통해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부디 더 많은 여성 독자들에게 이 책이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