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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난 2024년, 한 해 동안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공연 관람'이라고 즉각 답할 정도로 무수하고 다채로운 공연을 향유하고 다녔다. 형형색색의 공연을 만나볼 수 있는 대학로 근처에 회사가 위치한 덕분에 퇴근 후 일상에는 공연이 자리했다. 주말에도 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다. 과거에는 2주에 1편 정도 공연을 찾았다면, 작년에는 일이 바쁠 때를 제외하곤 1주에 2~3편을 관람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문화생활을 즐겼다.

 

직업 특성상 공연계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많은 초대를 받았다. 이는 내 시야를 확장할뿐더러 힘들고 지칠 때마다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했다. 하루를 버틸 힘을 주는 공연 덕택에 내일을 기대할 이유가 생겼고, 극의 재미와 관계없이 2시간 남짓 동안 공연과 함께하는 건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보통 매일 상연하는 연극/뮤지컬 위주로 관람했으나, 간간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나 페스티벌도 함께 즐기며 공연의 무한한 가능성을 맛보았다. 어떤 종류의 공연이든 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기보다는 다양한 공연을 도장 깨듯이 보는 타입인지라 이러한 행위에 쉽게 흥미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몇몇 대학로 창작극의 경우, 특정한 소재를 가진 극이 흥행하면 우후죽순 비슷한 내용을 무대에 올려서 실망했던 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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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공연 관람 후에는 필수적으로 하는 습관이 있다. 바로 모바일 일기장에 스토리, 캐스팅, 연출, 무대, 극장 컨디션 등에 관해 간단한 후기를 남기는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한 후, 훗날 그날의 기억을 꺼내 보거나 리뷰를 작성할 때 참고하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말을 회고하기 딱 좋은 12월쯤 일기장이 이유도 모르게 초기화되었다. 최다 공연 관람을 기록한 2024년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안 났다. 열심히 끄적였던 작년의 기록이 모두 날아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서 기억이 더 휘발되기 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공연들의 한 줄 평(평가보다는 요약에 가깝다)을 적어보고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어떤 평은 혼재될지도, 다른 평은 비약일지도, 또 다른 평은 진부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 모든 평은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감상을 이야기할 뿐이니 양해를 구한다.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테마에 걸쳐 한 줄 평을 쭉 나열할 테니 가볍게 읽어주길 바란다.

 

 

*2024년에 관람한 연극/뮤지컬 대상으로 작성, 일부 공연의 경우 결말에 대한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N차 관람 욕구를 자극하는 웰메이드 공연


 

1. 뮤지컬 <일 테노레>

억압된 시대에서도 찬란한 꿈을 꾸는 조선 문학회 학우들의 감동적인 피날레

 

2. 뮤지컬 <레미제라블>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프랑스 혁명군의 장엄한 하모니가 선사하는 소름 끼치는 전율

 

3. 뮤지컬 <홍련>

한국 전통 설화와 현대적 무대의 만남으로 탄생한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

 

4.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 두 헬퍼봇의 아름다운 만남과 헤어짐

 

5. 뮤지컬 <긴긴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물들의 기나긴 밤 속에서 발견한 연대와 희생의 숭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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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홍련> / 출처=마틴엔터테인먼트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한 공연


 

1. 뮤지컬 <렌트>

하루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파격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보헤미안들의 일생

 

2. 음악극 <섬:1933~2019>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섬 안에서 사랑으로 건네는 구원의 손길

 

3.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사회 불안 장애를 앓는 한 소년이 전 세계에 외치는 희망의 메시지

 

4. 뮤지컬 <유진과 유진>

이름이 같은 두 소녀가 어린 시절 함께 겪은 고통을 나누며 성장하는 이야기

 

5. 연극 <프레드>

퍼펫 인형 프레드가 고발하는 장애인들이 처한 불평등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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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 출처=에스앤코

 

 

 

뚜렷한 장르적 특성을 보여준 공연


 

1. 뮤지컬 <드라이 플라워>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직접 연주하는 설화고 밴드부의 청춘 멜로디

 

2. 뮤지컬 <오즈>

가상현실 게임 AI가 바쁜 현대인들에게 말하는 느림의 미학

 

3. 뮤지컬 <접변>

중국에서 날아든 두 나비의 고혹적인 춤사위에 숨겨진 반전과 진실

 

4.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일찍 단명한 경종의 삶을 색다른 관점에서 조명한 참신하고 탄탄한 역사극

 

5. 창작 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삼대에 걸친 악순환을 후드로 표현하는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가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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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드라이 플라워> / 출처=네버엔딩플레이

 

 

위에 기술한 15편의 극 외에도 뮤지컬 <하데스타운>, <마타하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영웅>, <브론테>와 연극 <세계몰락감>, <킬롤로지>, <보이즈 인 더 밴드> 정도가 뇌리에 남았다. 여기서 다룬 극들은 '추후 티켓을 구매해서 재관람할 생각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한 후 세부적으로 나눈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기장에서 사라진 기록 대신 머릿속 기억을 짜내면서 그 당시의 감정을 되짚어봤다. 공연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 긍정에 가깝다면 답은 쉽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공연 회고를 마치고 나니 작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개중에는 기대보다 재밌었던 공연도, 기대보다는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만족했던 공연도 있었다. 특히 잘 만든 창작극을 발견했을 적에는 그 감동이 더했는데, 신선한 소재는 물론이거니와 그걸 풀어내는 방식 역시 특색 있었기 때문이다. 2024년에는 꽤 괜찮은 신작들, 특히 여성 서사극의 연속적인 흥행이 이뤄지면서 대학로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았나 싶다.

   

2025년에는 또 어떤 극들이 올라올까? 이번 해에도 어김없이 창작 신작들이 쏟아지길, 바로 막을 내리지 않고 연장 공연을 이루는 쾌거를 거두길 바란다.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세상에 갇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때마다 유일한 탈출구는 공연이었기에 올 한 해에도 꾸준히 탈출하면서 세상을 탐험하고 싶다. 이제는 새로 다운 받은 일기장에 최근 본 공연들을 차근차근 기록할 예정이다. 곧 개막할 공연들에 모쪼록 잘 부탁한다고 전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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