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주로 향했을까?
최근 나의 생활을 요약해 보자면 '불안함'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 이해가 가지 않는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나의 마음은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누군가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도 보이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불안함을 온전히 혼자 마주하고 싶었고, 결국 혼자 여행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여행의 목적지는 '경주'였다.
경주는 추억의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때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당시 수도권에 있는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가는 6학년 수학여행지는 '경주'가 대표적이었다. 늦은 저녁에 도착해 '첨성대'와 '안압지(현재의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다음날에는 석굴암과 불국사, 마지막 날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내 기억 속 6학년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은 '정신없이 지나가는 회전초밥'이었다. 차분히 앉아서 첨성대와 안압지의 야경을 감상하고 싶었으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굴암 앞에서 멍하니 그 인자한 불상의 미소를 바라보고 싶었고, 박물관에 전시된 웃는 기와를 보며 함께 미소를 짓고 싶었던 '6학년의 나'에게는 여행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신없는 순간들 속에서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순간이 있다. 바로 '대릉원'에서의 기억이다.
대릉원에서 나는 당시 내가 원했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다. 대릉원은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다른 장소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다. 당시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최대한 차분하게 관람하도록 했고, 덕분에 나는 고요한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당시의 기억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당시 대릉원에서의 아름다운 고요함은 현재 복잡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필요한 정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설 연휴 전, 어린 시절의 고요함을 더 깊게 감상할 수 있는 시기의 나에게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경주를 향해 나아갔다.
고요함을 찾아서
경주에 도착한 나는 우선 짐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첫 셔터를 눌렀다. 바로 위의 사진이 경주에서의 내 첫 사진이다. 경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는 동안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우뚝 솟아 있는 많은 '릉'이 내 눈을 사로잡았으며, 마침 숙소와 대릉원이 참 가까웠고, 노을이 지는 시간대라 갈색으로 물든 '릉'과 노을이 참 잘 어울릴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바로 대릉원으로 향했다.
대릉원에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우뚝 솟은 '릉'이 내 카메라를 맞이했다. 보자마자 감탄사가 나왔다. 그저 무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신라의 천년 역사를 이끈 장본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너무나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그런 자태여서 나는 멍하니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바로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양 옆으로 펼쳐진 '릉'의 사이를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대릉원의 문이 나왔다. 대릉원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황남대총'이라는 가장 큰 고분이었다.
황남대총의 옆에서 위를 올려다 봤을 때의 시점이다.
가장 큰 황남대총은 부부가 함께 묻혀 있는 무덤으로써, 아직 그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 '릉'이 아닌 '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이 무덤을 보며 무덤의 주인이 가진 '권력'과 그 권력에 복종했던 이 무덤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라의 천년 역사를 이끈 그들이 가진 권력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산을 반대쪽으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목숨을 놓고 결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작은 행동 하나로 나라가 뒤집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권력 아래에서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고생 또한 엄청났을 것이다. 이 무덤을 만들며 과연 몇 명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을지, 그리고 그 아픔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이들이 있었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내가 대릉원에서 느낀 고요함과 엄숙함, 그리고 아름다움은 수많은 무덤 아래에 잠든 권력자들을 향한 것이 아닌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 준 수많은 '작은 이'들을 향한 박수이다.
화려함보다 본질을 비추는 빛의 향연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의 조명은 장소가 주는 우아함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물에 비친 월정교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며 웅장함을 더 극대화한다.
경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건축물과 조명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 있는 다양한 건축물의 조명도 아름답지만 유독 경주의 조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색 자체를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는 레이저를 쏘거나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건축물을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물론 건축물 자체의 색이 화려하지 않을 때 야간 관람을 위해 비추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이 주는 아름다움을 존중했으면 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동궁과 월지', '월정교'의 조명은 수수하지만 건축물의 색을 잘 살리게 함으로써 우아함과 웅장함을 더 극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워낙 유명한 야경 명소라 그런지 외국인 관광객이 참 많았다. 그들은 아름다운 야경을 보며 입에서 'Wow! It's so beautiful!', 'Awesome!' 등 감탄사를 계속 뱉어냈다. 그리고 카메라를 봤는지 나에게 사진을 요청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붉은색과 초록색,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는 단청과 작은 연못이 이루는 우아함은 내 입에서도 '우와!'라는 감탄사를 끊임없이 뱉게 만들었다. 또한 그 우아함 앞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이 감히 부끄러웠다.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의 야경이 아름다운 것은 알고 있었으나 '월정교'는 잘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경주 최고의 야경을 꼽으라면 나는 '월정교'를 선택할 것이다. 저 사진(월정교)을 건지기 위해 냇물이 흐르는 돌다리 위에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셔터를 눌렀다. 그 결과 경주에서 찍은 베스트샷을 건질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한동안 돌다리 위에서 월정교의 모습을 감상했다. 냇물에 비친 월정교의 모습이 물결과 함께 요동칠 때마다 물에 물감이 퍼지는 것 같이 아름다운 색깔이 일렁거렸고 월정교를 수채화로 그리면 딱 물에 비친 월정교의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
둘째 날, 숙소에서 나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사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박물관에 가는 것을 즐기는 일명 '박덕(박물관 덕후)'이다. 특히 이곳은 '경주', 땅만 파도 유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황금 도시 아닌가! 무조건 박물관을 가서 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라의 '황금 유물'을 보고 싶었다.
박물관에 도착한 나를 반기는 것은 '에밀레종'으로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었다.
종을 칠 때 '에밀레~'하는 소리가 난다고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은 박물관 밖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 종을 봤을 때 너무나 평범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저게 진짜 '성덕대왕신종'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종은 20분 간격으로 종소리를 틀어주는데 직접 타종을 할 수 없어 녹음한 소리를 틀어준다.
종소리를 듣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를 거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 시간의 순서대로 깔끔하게 전시가 되어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빗살무늬토기'
그 유명한 빗살무늬토기와 비파형 동검,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등 교과서 속에서만 보았던 구석기부터 청동기까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다양한 유물을 내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플래시와 삼각대는 금지다.) 그렇게 셔터를 누르다 보니 청동기를 지나 신라의 유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라시대의 유물은 금관과 말안장, 허리띠 등 무덤과 관련된 유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내 시선을 끈 하나의 비석이 있었다.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이 비석은 '이차돈 순교비'로 신라 법흥왕,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비석이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려고 했으나, 민간 신앙이 자리 잡고 있던 신라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차돈'은 법흥왕에게 본인에게 '왕명을 사칭한 죄'를 뒤집어 씌워 목을 베라 하였고, 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형 집행 전, 이차돈은 본인의 목을 베었을 때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 예언했고,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솟았고, 꽃비가 내렸으며 그의 목은 금강산에 떨어졌다. 그리고 결국 신라는 불교를 승인하게 되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흰 젖도 꽃비도 아닌 종교를 위한 '순교'다.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으로서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종교를 위해 '순교'하는 것, 엄청난 신앙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맹목적인 신앙심이 아닌 순교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숭고한 사명감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말하는 지금의 당연한 것들(평등, 사랑, 인권 등)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겪는 다양한 아픔(불평등, 차별, 비난 등)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을 향한 사랑이 결국 종교를 위한 '순교'가 아닌 사랑을 위한 '순교'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순교로 만나게 된 종교가 지금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을까?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 30호)
많은 이들에게 종교란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절에 가서 자녀의 대학 합격을 위해 108배를 하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은 종교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을 '위로'받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은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
누군가 또는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경주와의 만남 후
1박 2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얻은 것이 참 많았던 훌륭한 여행이었다. 경주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채울 수 있었다.
'대릉원'을 통해 지금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수많은 작은 이들의 땀과 헌신, 그리고 감사함을 알게 되었다.
'동궁과 월지', '월정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통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닌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이차돈 순교비'를 통해 세상 속 아픔을 겪는 수많은 이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를 위해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던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수없이 흔들리고 넘어지겠지만 그때마다 경주와의 만남을 기억하며 내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상기시키며 살아가야겠다. 나를 잘 잡아준 '경주'에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