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이나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에 창조된 그림을 보면 확실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거룩한 성자와 성녀의 그림, 완벽에 가까운 비율의 인물화 등을 볼 땐 경건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을 그려낸, 정말 '거대한 의미'라곤 보이지 않는 작은 그림책의 그림을 볼 때 필자는 웃는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정말 좋아했던 그림책이 있다. <은지와 푹신이>라는 책인데, '은지'라는 어린 아이가 애착인형 '푹신이'를 데리고 할머니집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옆자리에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는 여우 인형을 앉혀놓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느끼는 은지의 표정이 좋았다. 그것은 곧 어린 시절의 필자가 보인 표정이었고, 친구들이, 이웃들이 보인 표정이자, 모든 어른이 가졌던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까지도 그 오래된 그림책이 좋다. 어린 시절의 일상을,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삽화를 통해 지친 일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에세이라는 건, 따라서,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써 작은 힐링을 선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세이지만 그림에 중점을 맞췄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더 생생하게 우리의 일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우연히 마음에 드는, 우연히 눈길을 끄는 그림을 보고 읽은 에세이의 내용이 마치 오늘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아무렇게나 펼친 장 속에서 뜻하지 않은 일상의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은 따스하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마이라 칼만이 출간한 아트북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에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을 담아낸 그림들이 실려있다. 각각의 삽화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림을 보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짧고 담담하게 적은 그림의 소개에서 우리의 이벤트가 떠오른다.
'과일들과 잼'이라는 그림이 있다. 양귀비일까, 붉고, 분홍빛의, 노란 꽃들이 화병에 꽂혀있고 근처에는 체리 세 알이 놓인 그릇과, 잼으로 보이는 게 담긴 그릇과, 노란색 과일 내지 열매로 보이는 것이 놓여있는 간단한 정물화이다. 어느 누군가의 책상에 놓여 있는 듯한 모습일 것이다.
위 그림에 매칭된 에세이의 내용은, 소통 없이 소통하는 나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소회이다. 서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내놓으며 서로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의 결핍이 진정한 소통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작가는 결국 남편과 주고받는 서로의 문장을 이해하기 그만둔다. 각자 자신의 할 말을 중요시하여 서로의 말은 경청하지 않는 이 불성실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살면서 한 번은 경험해봤을 이야기다.
문득 유쾌하지 않게 끝나버린 관계가 생각난다. 그 친구와는 '진정한 소통'을 한 것일까. 만약 우리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면, 만약 내가 너의 말을 마음 깊게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금은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다 이내 책을 덮고 그 시간에 집중해본다. 우리는 정말, 처음부터 서로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우리는 실질적인 대화를 한 적은 있었을까? 너와 나는 비록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우리 둘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소통이었던 게 아닐까? 어느새 필자도 필자의 책상에 기대 허공을 바라본다. 나만의 책상에 나만의 정물을 놔두고.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에는 그저 그림에 대한 짧은 소개만 있는 그림들도 많다. 예를 들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견주에 대한 내용도 실려있다. 그것을 보면 이웃들이 생각난다. 강아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혹은 목줄을 쥐고 산책을 시키는 이웃들의 얼굴들. 우리를 그린 그림 속에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삶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일종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일상이라는 것은 문득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니까. 앞으로 종종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려고 한다. 내 인생의 작은 일상을 발견하는 재미는 생각보다 소중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