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즐겨보는(정확히는 즐겨보아왔으나 요즘 들어 더 즐겨보기 시작한 것인) '무한도전' 프로그램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프로그램 진행자 유재석이 철학자 '사르트르'가 주장한 내용이라고 하면서, 이내 한 문장을 언급한다. 바로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앞뒤 아무런 맥락 없이 던져진 문구이기에, 나는 그저 진행자가 무슨 의미인지를 더 설명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B와 D사이의 C야? 그럴거면 A와 C 사이의 B라고 해도 되겠다.' 그리고는 한 가지 웃긴 상황이 벌어졌는데, 조금 있다 멤버 한 명이 바로 나와 똑같은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비슷하구나 하면서 내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그 문구로 돌아와서, 그 문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B'ir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이라는 것이다. 유재석이 이를 설명하자 마자 멤버들을 비롯한 나도 그 문장의 함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뭐랄까, 언어의 유희를 이용한 삶의 진리(?)를 표현해냈다는 생각에 나도, 티비 속 무한도전의 멤버들도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시대 속에서 엄청난 고도의 지적 작업을 통해 삶의 진리를 표현해내는 철학자들의 문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철학을 전공한 사람의 필자의 촉에 따르면 뭐랄까, 해당 문장은 너무 과하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로 분류되는 철학자이긴 하지만 과연 그가 진정으로 주장했던 말이 맞는지조차도 의구심이 들어서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려 찾아 보았다.
찾아본 결과, 역시나 사르트르의 어느 저서에서 그런 문구가 나왔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현대인의 비공식 백과사전과도 같은 OO위키에서 찾아본 결과, 2010년 경 인도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2010년 대 초반에 놀랍게도 한국 개신교단에서 이 문구를 사르트르의 문장으로 지정하여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이 문구는 정식화되어 미국에 역수출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합리적인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프랑스인이었던 사르트르에게는 영어보다 자연스럽게 프랑스어가 더 익숙할 것이고, 프랑스어의 탄생은 Birth와는 다르게 Naissance이며 죽음은 Death와 다른 Mort이기 때문에 그가 주장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과연 매체에서 철학자를 다루는 것에 있어 평소에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방식이 있는데, 바로 해당 철학자의 앞뒤 문단의 맥락 없이 단편적으로 하나의 문장만을 제시하여 그것의 뜻을 '입맛에 맞도록' 과하게 의미 부여하는 경향이다. 그것이 꼭 잘못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긴 흐름 속에서 고유의 사고 과정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그 문장이 앞뒤 맥락 없이 단편적으로 제시될 때 오독될 위험성은 상당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즈음 그것의 피해를 받고 있는 철학자는 아무래도 '니체'인것 같다.
바쁜 현대인의 삶 속에 그 긴 흐름을 하나하나 파악할 시간이 어디있냐며, 따라서 누군가가 그 긴 흐름을 압축해서 하나의 간결한 해석으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단순화되고 압축되어 변형되기 이르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결론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사고도 그렇게 단순화되고 압축되기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한 번 놀라운 것은 오늘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르트르가 해당 문장을 말한 것이 진짜인가 혹은 가짜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의 문장, 하나의 결론으로 압축되는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우려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진짜로 말한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문장을 우선 받아들인다고 할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필자의 경험을 들어 조심스러운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말로 과연 우리 모두의 인생은 매 순간순간 마다 크고 작은 선택을 통해 결정되고 진행된다. 필자는 철학과 석사과정을 다니고 나서 1년 동안을 직장을 다니면서 졸업 논문을 썼다. 이를 말하는 이유는 직장과 공부를 병행한 필자 자신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그러한 선택을 한 나 자신에 대한 인정과 수용의 과정이 부재했음으로 인해 긴 시간을 방황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도르노를 전공했는데, 아무런 배경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외부 강의와 스터디를 하면서 머리를 짜낸 결과 결국 논문을 쓰고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논문을 쓰면서, 그리고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나서 졸업을 하고 나서도 '직장과 논문 작성의 병행'이라는 선택을 한 것을 이따금씩 계속적으로 후회를 했다. 그 후회의 기저에는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자조와 자신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충동에 의한 이끌림은 아니었다. 필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본인이 가진 근본적인 고민을 자신의 논리 과정에 따라 답을 찾아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졸업 후 오랜 시간 동안을 그러한 선택을 한 나 자신에 대해 비난을 계속 했다. 그 계속된 비난은 결국 신체화로 이어지게 되어 남은 2024년을 여러 병원을 오다니며 보내게 되었다. 연말에 독감으로 약간의 과장을 담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렇게 2025년이 되어 조금 살만해진 요즘 깨닫게 된 것은, 고민의 끝에 내린 선택에 대한 '존중'과 '수용' 역시 그 선택만큼 중요하게 이뤄져야 할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매일 의미없는 반복에 불구해보였던 나의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