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안해도 나이는 먹어야 한다 - 틱틱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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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었다. 꽤. 물론 아직 젊은 축에 속하지만, 나이 드는 속도가 매번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이렇게 빨리 이 나이가 될 줄 몰랐다. 시간이 빠른 건 무섭지 않다. 그 긴 시간이 흘러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인 게 무섭다.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기만 할 뿐, 나를 바꾸는 건 나의 몫이다.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한 어른의 모습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직접 가꾸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뜻대로 안 되는 게 많다는 사실과 모든 게 나한테 달려있다는 걸 동시에 깨닫는다. 비극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숙해지는 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닌데, 더 이상 맘 편히 남 탓만 할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약해지고 불안감만 쌓인다.
영화 <틱틱붐>을 본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때도 영화를 보면서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서른을 앞둔 존의 불안에 공감했는데…. 젠장. 그새 두 살을 더 먹었다. 이야기 속 존의 나이는 서른 살로 고정되어 있고, 나의 나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이제 내 나이는 처음 영화 <틱틱붐>을 봤을 때보다 존과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존의 나이를 뛰어넘을 것이다. 2년이 흐른 지금도 내가 여전히 불안에 떠는 것처럼 나중에 존보다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 그때도 나는 매일 ‘이게 맞나?’라는 의문을 품을 것이고 잘난 주변 사람을 부러워하며 살아갈 게 뻔하다.
그래도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는 않다. 오히려 기대되기도 한다. 과거의 나는 2025년의 내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실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얄팍한 예측을 초월했다는 생각만 든다. 2년 만에 뮤지컬을 통해 존과 재회하며 알게 되었다. 나, 여전히 불안하고 한심하고 자책하지만, 그래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여유로워졌구나. 2년의 시간 만큼 더 축적된 여유와 함께 오랜만에 존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니 그들을 향한 평가도 달라졌다. 영화를 볼 땐 존의 불안감에 같이 짓눌렸던 것 같은데 뮤지컬을 볼 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저들이 빛나 보였다.
<틱틱붐>은 브로드웨이의 유명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 조나딘 라슨이 <렌트>를 만들기 전 불안한 지망생으로서 보냈던 시간을 담은 자전적 뮤지컬이다. 2001년 6월 제인 스트리트 극장에서 처음 선을 보였으며, 2021년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제목 ‘틱틱붐’은 조나단 라슨 즉, 존의 불안감을 상징하는 소리다. 시계추가 움직이는 틱, 틱 소리. 그리고 폭발이 터지는 소리 붐! 어느새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야 할 나이인 서른 살을 앞두고 8년째 뮤지컬 제작에만 매진하는 존은 머릿속에서 시계추가 틱틱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일분일초가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붐!하는 폭발음을 들으며 절망적인 미래가 닥치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존에게는 여자 친구 수잔이 있고, 친한 친구 마이클이 있다. 그들 모두 존의 꿈을 응원하지만, 오랜 시간 뚜렷한 성과 없이 긴 터널을 건너는 존에게 두 사람은 든든한 지원군인 동시에 불안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수잔은 존과의 미래를 그리기 위해 안정적인 선택지를 고려할 것을 제안하고, 마이클은 꿈을 버리고 현실을 택한 덕에 가난했던 지망생 시절과는 다른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며 존에게 고민을 안겨준다.
존은 4년째 음식점 서버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책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아부었는데도 뮤지컬로 성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그런 와중에도 존은 뉴욕을 떠나 한적하게 지내자는 수잔의 제안에, 자신이 다니는 회사로 들어오라는 마이클의 제안에, 죽기 전에 꼭 취직하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모두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알고,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존은 차마 뮤지컬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
뮤지컬을 향한 존의 집념은 열정일까, 오기일까? 처음엔 열정이었을 것이다. 뮤지컬만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고 찬란하게 빛날 미래를 꿈꾸며 설렜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한 것보다 남루한 현실이 오래 지속되면서 존 스스로 이러한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사실 나에게 재능이 없나?’ ‘평생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지?’ 의심을 품기 시작했을 땐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고, 꿈에 대한 미련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른 살 생일을 앞둔 존은 열정과 오기가 뒤범벅된 상태에서 틱, 틱, 붐! 소리를 들으며 결국 작곡을 계속할 것이다. 물론 모두 제삼자인 내가 함부로 상상한 내용이다. 영화와 뮤지컬 한 편으로 조나단 라슨의 삶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8년을 보냈는지는 뼈저리게 공감이 됐다.
내가 처음 영화 <틱틱붐>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던 건 꿈에 매달리는 청춘을 미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을 가졌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 맞지만, 꿈 때문에 매일 자신을 의심하고, 잘나가는 친구를 질투하고, 연인에게 배려할 여유조차 없는 상황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사람들이 대견해하는 고생담도 결국 성공한 미래를 전제로 할 뿐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럼 일부 성공 사례를 제외한 고생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
조나단 라슨도 평범한 청춘은 아니다. 결국 <렌트>라는 세계적인 뮤지컬을 탄생시켰으니까 말이다. <틱틱붐>도 <렌트>가 있기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틱틱붐>을 ‘존이 젊어서 고생하다가 결국 <렌트>로 성공한 이야기’로 요약할 수는 없다. 존은 <렌트>의 개막 하루 전에 세상을 떠났다. <렌트>의 성공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처음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을 누리지 못한 그가 안타까웠다. 그러다 곧 생각을 바꿨다. 존의 지난 8년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동정한단 말인가? 그의 지난 시간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렌트>를 위해 희생한 시간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 점을 감히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영화 <틱틱붐>을 봤을 땐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안감에 집중했는데, 이번 뮤지컬 <틱틱붐>을 봤을 땐 나이에 집중해서 관람했다. 그동안 불안과 나이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는지 알게 되었다. 불안은 시간을 의식할 때 나온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지내다가도 틱, 틱 초침 소리가 들리면 숨이 턱 막힌다. 시간은 단 1초도 멈추지 않는데 나는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들다. 틱, 틱. 또 시간이 흐른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다. 틱, 틱. 또 시간이 흐른다. 친구들이 번듯한 어른이 되어 SNS에 눈부신 일상을 공유한다. 틱, 틱. 또 시간이 흐른다. 꿈을 포기하지도, 꿈에 매진하지도 못한 채 나만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틱, 틱, 틱, 틱… 붐!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고 나락에 빠질 것만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 나는 나락에 빠지지 않았다. 당장 인생이 망할 것 같다는 불안을 몇 년 전부터 느꼈는데, 당장은커녕 몇 년이 지나도 내 인생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다. 항상 나는 꿈을 이룬 먼 훗날을 상상하며 준비생의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냈는데, 돌이켜보니 그동안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가득했다. 가끔 사진첩을 보면 깜짝 놀란다. ‘이렇게 행복한 일상이 많았다고?’ 그리고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왜 나는 내가 불행한 줄 알았지? 왜 행복을 기다리고 있었지?’
지금의 내 나이가 극 중 존과 비슷해서 그런지 그가 나이를 언급할 때마다 더더욱 나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행복했던 기억과 불행했던 기억 모두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게 아니었구나.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순간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구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의미 없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없구나. 그건 존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 살다 보면 나이 강박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한동안 꿈을 펼치고 싶다는 갈증과 이미 늦었다는 무력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며칠 전 비로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나도 모르게 ‘이 나이에’로 시작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릴 뻔했다. 그러다 서둘러 마음을 다잡았다. 늦지 않았다고. 성실하게 채운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될 거라고. 꼭 목표를 이루지 않아도 되니까 오랜만에 생긴 목표를 함부로 포기하지 말자고.
존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서른 살 생일에서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존은 서른 살 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의 작품과 인생 이야기는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그는 비록 화려한 서른 살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당장 결정되는 운명은 없다. 존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다고 해서 그의 삶 전체를 비극적인 운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나는 존이 두려워했던 서른 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게 된다. 아마 그때도 내가 화려하게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 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내 삶은 매 순간 찬란했고 지금도 찬란하다. 앞으로도 찬란할 것이다. 존처럼. 여전히 한심하고 불안에 떠는 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른이 되고 있다.
[진금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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