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stuck in, 종이 캔버스에 혼합재료
이 작업은 내가 살면서 느끼는 공포나 욕망을 다뤄온 방식, 그것에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밀며 부정하거나 체념해온 것들,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모든 과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항상 무언가를 좇으면서 느끼는 불안감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무의식적인 욕구는 나를 외부로부터 도망치게 만들며, 일정량의 고통을 유지할 수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여러 자해성 행동들을 번갈아가며 꾸준히 하거나 한 가지가 위험해 질 때까지 대수롭게 여기며 계속 한다. 한 가지 잔인한 점은 이러한 행위들을 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안정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불안을 피해 쾌락을 찾으려 나라는 더 높은 권력의 지배하에 나약해진 자아를 밀어넣고 복종한다. 지나치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방식으로 결국 나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 고통받으며, 무의식적으로 죄값을 치룬다고 여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는 한 철학가의 말을 빌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려는 충동이 있지만 이것이 외부에서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욕구들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파괴적 회피행동’은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억누르고 억제하려는 마음이 과도하게 발달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무의식 속의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불필요한 처벌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런 심리적 성향은 공격 충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갑자기' 평화와 사회의 구속을 받게 되면서, 그의 무의식적인 공격 충동이 갑자기 저지당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사람에게는 타고난 공격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이를 사회 규범화된 죄책감으로 억누르고 있다. 외부 세계로 나오지 못하는 공격 충동은 강제적으로 내부 세계에서 새로운 충족과 만족을 찾게 된다. 이것은 자신을 혼란시키고 공격하고 파괴하면서, '자기학대'를 하면서, 쾌감을 느끼면서 충족된다. 폭력적으로 잠재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이러한 자유의 본능은 억눌리고 뒤로 물러나고 내면세계로 들어와 마침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발산하고 드러내게 된다.
‘안정’과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에 작품은 다소 잔인하며 인물들의 모습은 처량하고 기괴해보이기도 한다. 처박히는 행위는 외부로 공격성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을 아프게 하는 행위, 즉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공격성을 변형시킨 행위이다. 이곳에서는 자발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것, 자신에게 스스로 고문을 가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처박혀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파괴를 하며 안정을 얻는다. 이곳에서 파괴적인 행위는 안정을 찾는 행위로 재해석된다.
밖으로 배출될 수 없을 때 안으로 방향을 돌리는 인간의 잔인성을 보라. 보통 ‘잔인성’ 이라함은 ‘타인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라는 점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거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쾌감을, 넘칠듯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욕구를 고통스럽게 해소시킬지언정 결국 본인을 위한 선의 추구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다. 여기는 부정적인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