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류세 미술의 바다에서 표류하기 - 제4회 제주비엔날레 아파기 표류기: 물과 바람과 별의 길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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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제주비엔날레 <아파기 표류기: 물과 바람과 별의 길>
제주도립미술관, 2024.11.26. – 2025. 02. 16.
지난 12월 24일, 제주도립미술관에 방문해 제4회 제주비엔날레를 감상했다. 2022년 제3회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에 이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내가 또 다시 비엔날레 기간의 제주를 찾은 것은, 지난 3회에서 큰 흥미와 더불어 어떠한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제주비엔날레는 201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야심 차게 출범해, COVID-19와 내부 사정으로 전시가 연기되는 등, 큰 우여곡절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제3회부터 동시대 미술의 주류 흐름인 ‘인류세’를 중심으로 새로운 컨셉을 잡아 나가며 성공적으로 다시금 발돋움했다. 제3회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에 이은 제4회 <아파기 표류기: 물과 바람과 별의 길> 역시 ‘동시대 인류세 미술’을 큰 키워드로 잡고 간다. 다만 오늘날의 비엔날레는 지난 3회보다 훨씬 ‘제주’ 자체의 지역성을 강조하는 제목과 컨셉으로 확실한 차별화를 거쳤다.
<아파기 표류기>. 다소 생소한 제목이다. ‘아파기’는 역사 기록 속 탐라(옛 제주 지명)의 왕자이다. 이번 전시는 일본의 사신이 우연한 표류를 통해 탐라에 도착한 것, 이를 계기로 ‘아파기’가 일본에 입조하게 된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예술이라는 하나의 대양에서 정치, 생태, 종교,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가 각종 해류를 타고 만나 융합하는 ‘인류세 미술’을 ‘표류’라는 단어로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다. 우리는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스스로 그 목적을 찾아야 한다.”] - 장 폴 사르트르
<바다풍경_제주>, 김순임, 2024, 제주 해양 플라스틱, 무명실, 가변크기.
1층 전시장 입구, 김순임 작가의 설치 작품은 감상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수집한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소재, 색깔별로 모아 매달아둔 해당 작업은 쓰레기가 어떻게 작가만의 조형 언어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를 가장 단순하게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업 과정을 담아낸 비디오도 입구 오른 편에 설치되어 있다.
<도항 추적자>, 김경훈 박준식, 2024, 액침식물표본, 자작나무합판, 흑백사진, 현미경, 오브제, 가변 크기
전시장 입구 안쪽의 오른 편에 자리한 김경훈, 박준식 작가의 <도항 추적자>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에 가장 걸맞는 작품일 것이다. 탐라국의 왕자 아파기가 일본의 견당사 일행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현대의 제주 항구와 DMZ 등 ‘경계’의 의미가 강한 공간으로 ‘도항(배를 타고 바다를 건넘)’의 의미를 확장해 경계를 넘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식물 표본들을 합판 지도 위에 아카이빙한 작품이다. 작가들은 연구자의 책상처럼 어지러이, 그러나 나름의 질서를 갖추어 놓인 표본들 사이를 감상자들이 자유로이 표류하며, QR코드를 찍어 식물의 이름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두었다. 이 행위를 통해 도항은 감상자와 식물 표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듦의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도시 릭샤 프로젝트의 섬 여행일기>, 린슈카이, 2024, 혼합 매체, 가변크기
김순임 작가 뿐만 아니라 참여 작가 대부분이 작업 과정을 아카이빙하는 방식으로 사진뿐만 아니라 비디오를 택했다. 오늘날 동시대 작가들에게 비디오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린슈카이 작가는 <도시 릭샤 프로젝트의 섬 여행일기> 작업에서 릭샤(인력거)를 이끄는 페리맨(뱃사공)을 도시를 표류하며 도시인들을 이끌어 안내하는 존재로 은유했다. 작가가 디자인한 릭샤와 함께 페리맨의 여정을 담아낸 비디오가 전시되었다.
<방랑자>, 타오 야 룬, 2023, VR, 컴퓨터, 3D 스테레오 카메라, 5G 네트워크, 로봇, 15x25x100cm
타오 야 룬 작가의 역시 그의 작업 <방랑자>에 정치성과 지역성에 기반한 현대적 표류의 의미를 작업에 담아냈다. 그는 러시아의 침략 전쟁으로 고향 우크라이나에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위해 디지털 기기를 디자인, 발명했다. 그리고 직접 이를 짊어지고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참여 학생이 기기를 통해 가족들과 온라인상에서 조우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과정을 담은 영상을 기기와 함께 전시했다.
동시대 미술에서 이처럼 첨단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와의 융합, 발명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작가들이 과학자, 생태학자, 엔지니어들과 협업하고,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물을 아카이브와 함께 전시한다.
<마이크로 피닉스의 발라드>, 우틴 찬사타부, 2023, 단채널 비디오, 키네틱 아트, 가변 크기
우틴 찬사타부 작가의 <마이크로 피닉스의 발라드>는 전시장 전체에 크게 울리는 청명한 방울 소리의 주인공이다. 해당 작업은 태국 치앙마이의 화재 피해 지역에서 발견된 미생물을 활용해 제작한 혁신적인 멀티미디어 키네틱 아트로, 기술과 생태학, 예술, 사회적 의의의 합일과 융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름 없는 자들>, 양쿠라, 2024, 철 프레임, 해양쓰레기, 유목, 250x250x500cm
<잊힌 흔적>, 양쿠라, 2024,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분 10초
<대마도>, 양쿠라, 2024, 장지에 채색, 210x150cm
양쿠라 작가는 제주 4.3의 역사와 기록, 현재를 ‘표류’의 키워드와 연관 지어 작업했다. 그는 바다를 표류하는 각종 해양 쓰레기, 유목 등을 수집하고, 4.3 사건 당시 일본 대마도까지 떠내려갔던 시신들의 행방과 함께 장지에 발견 위치를 표기했다. 치밀한 현장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비디오와 함께 설치된 해양 쓰레기로 만들어진 거대 구조물은 감상자들의 시선을 뺏음과 동시에 4.3에 대해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번 전시는 유난히 참여 작가들의 뛰어난 역량이 돋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동시대 작가들은 인류세 미술, 그리고 표류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아카이빙, 비디오, 회화, 설치 등 방식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국제적 생태 환경 문제와 정치, 사회 문제를 예술이라는 대양 아래서 펼쳐내는 인류세 미술의 현 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다만, 이번 제주비엔날레는 지난 제3회의 전시와 마찬가지로 ‘인류세 미술’, 즉 학술적인 영역으로 크게 확장하고 있는 동시대 예술을 주로 다루고 있는 만큼, 결코 일반 감상자들에게 친절한 전시는 아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술계 종사자, 관련자가 아닌 일반 감상자들에게 어떻게, 어떠한 우리의 언어로 다가가야 할지, 접근성을 올리기 위한 고민 역시 남는 전시였다.
우리나라는 종종 각 지역의 차별화되지 못한, 그저 유치를 위한 유치로 이어진 비엔날레가 너무 많다는 점에서 비판 받곤 한다. 대부분의 비엔날레가 차별화와 목적성의 측면에서 이 고뇌 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제주비엔날레 역시 이러한 고민 끝에, 과도기 아래 자리를 잡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 방문한 바, 차별화된 방향성으로 발전하는 컨셉에 따라 제5회가 더 기대되는 비엔날레라는 평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제4회 제주비엔날레 <아파기 표류기: 물과 바람과 별의 길>은 인류세 미술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만들고, 뛰어난 역량의 동시대 작가들을 한 데 모아 감상자들이 자유롭게 ‘표류’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그 존재 의의가 충분했다고 감상 후기를 마무리 짓는다.
[신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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