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면 항상 곤혹스럽다. 나는 보았고 독자는 보지 않았다는 거대한 시각적 격차를 글로 메운다는 건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현대 무용처럼 정형적이지 않다면 어려움은 곱절이 된다.
그럼에도 움직임을 매개로 하는 공연을 보고 글을 쓰는 걸 멈추진 못한다.
그곳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정직함. 순간의 몸을 통해 무언가를 발산하겠다는 의지에선 정직함이 느껴진다. 가장 원초적이고 현재적인 도구여서일까. 여느 때처럼 그 도구만이 재현할 수 있는 에너지에 기대를 품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의 제목은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으로, 그 의미는 과거 유인원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한 움직임이다. 흔히 ‘원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보법이다. 원시적이라는 명명처럼 표면상으로는 현대의 보행과 분명 차이가 있으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본질은 같다는 점에 눈길이 갔다.
끊임없는 움직임. 그것은 다섯 명의 무용수가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처럼 느껴졌다. 약 한 시간여 동안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무한한 동력의 방향은 항상 앞이다.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존재할 것이란 기대를 품으며 그들은 앞으로 간다. 기고, 구르고, 돌고, 뛰면서.
그들의 시선이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닌 앞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움직임도 자연히 앞으로 향한다. 자연히 현재의 동작은 미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만 기능하게 된다.
뚜렷한 목적지를 알지 못하지만 온 열정을 쏟아 움직이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왜?’라는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는 대체 어떤 진귀한 것이 있어서 현재에 머물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발버둥 치는 걸까.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될 쯤 화면에 커다란 문구가 적혔다. “이것은 진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직하고 순수한 관객으로서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내가 본 것은 진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구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류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으면서 진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당돌한 선언.
당황스럽고 급진적이지만, 이 공간에서 인류의 진화를 (압축적으로나마) 경험하고 체현한 것은 그 선언을 하고 있는 무용수들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에 그들은 진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지식과 권력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선언을 믿기로 한 순간, 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진화라는 관념이 깨부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진화의 정의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진화를 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성장으로 볼 때, 성장은 과연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그들은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지금에 대한 감각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지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먼발치에 놓인 시선을 조금씩 발 아래로 가져올 때 우리의 성장은 멈추게 될까. 그런데 그때의 성장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미래에 담보되어 있는(사실 담보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항상 현재보다 우위를 점하는 걸까. 머무름은 과연 또 다른 성장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애초에 성장이란 건 어디까지 필요한 걸까.
진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진화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수많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물음은 유효하다. 다만 그 속에서 어렴풋한 확신(혹은 다짐)도 피어났다. 앞으로 나는 움직이지 않기 위해 움직여보겠다고. 나의 움직임은 움직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서 있는, 몸과 맞닿아 있는 바닥의 감촉을 예민하게 느껴본다. 그곳에 기꺼이 머무르려고 해본다. 그것을 나의 진화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