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누군가 취미를 물을 때, 나는 주로 ‘공연이나 전시를 본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왜? 라는 의문을 가진지도 오래되었을 만큼 그건 나에게 관성적인 일종의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새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질문이 있던 나의 오래된 예전 시절, 그러니까 어른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 보았던 것 같다.
이 책의 글쓴이가 그림 작가들의 삶과 그 안에서 그가 그려낸 작품의 의미를 알아가며 내면을 성장시켰듯이, 나 또한 그림을 보고, 그 너머에 있는 작가들을 나의 상상 속에서나마 만나보며 위로와 배움을 얻어 조금쯤 더 나은 어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동안 참 반가웠던 것 같다. 글쓴이는 마치 인생 선배처럼, 그림을 그리던 시절 작가가 처해있던 상황이나 성향 등 내가 알지 못해 상상으로 매웠던 부분을 친근한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며 그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준다.
그 방식은 굉장히 친근해서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림에 해박한 친한 언니와 미술관을 함께 방문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글을 빌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그림 작가의 삶의 조각 중 인상 깊었던 것과, 그 안에서 느낀 점을 나도 기록해보고자 한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삶의 조각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마리아의 작품을 접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의 그림만 보고서는 그녀가 견딘 역경과 그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설만큼 단호하고 단단했던 그녀의 내면을 알지 못했을 것 같다.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체 뒤에 이토록 강인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 어른이 된 지금도 때로는 무겁고 무서운 세상을 대할 용기를 건내 주는 것 같다.
마리아의 어떤 어려운 환경도 저지하지 못한 그녀의 학구열과 호기심, 그것을 표현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남아 우리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다. 자연의 이치를 담아낸 그녀의 그림이 마리아라는 사람의 삶의 조각을 알고 나니 배울 점이 많은 그녀의 삶의 태도와 함께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실 번데기 내부에서는 애벌레의 기관과 조직이 성충의 구조로 바뀌는 극적인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메리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역시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 않았을까"] - p.33
나는 나비를 참 좋아한다. 나비의 아름다운 외관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날개만 보면 죽은 듯 정적인 그의 번대기 시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대비가 마리아의 그림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림을 처음 본 순간은 화려한 나방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곧, 바닥에 조용히 누워있는 번대기에 알게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비는 번대기를 뚫고 나와 성충이 되면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을 들어보았던 것 같다. 그만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극적인 변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번대기는 조용히 껍질 안에서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피해 수도원에서 지내며 다음 작품을 위한 탐색을 계획했던 마리아처럼 말이다.
책을 통해 마리아의 작품과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며 지금의 나 역시 번대기가 아닐까 하는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어둡고 기약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시기를 잘 버티고 나면 곧 자유로운 날개를 얻어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따스한 희망을 마리아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공예를 통해 남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의 조각
나에게 공예품은 소장 욕구를 가장 크게 불러일으키는 작품 형태이다. 그만큼 인고의 시간을 거친 직조 과정을 통해 완성된 화려한 자수의 형태는 보기만 하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워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소장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공예품들 안에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여성 예술가들이 남아 있는지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여성의 예술로 인식된 공예 작품들이 또 얼마나 많은 편견 위에 놓여 있었는지도 책을 통해 접하며 세상이 원하는, 만들어낸 작품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역사에는 늘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있었다. 이제 그녀는 왜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는가? 로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이것을 집요하게 캐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닌지 를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 p.120
역사에 길이 남아 칭송 받은 순수 예술의 대가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이다. 그들의 작품은 때로 그들의 명성에 의해 더더욱 유명해지고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지난 날의 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글쓴이가 제시한 질문을 머릿속에 새길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낸 여성들이 한 명의 작가로, 이름으로 기억되지 못하는 이 기조는 이제 당연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공예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이제 나는 작가의 이름을 꼭 한번씩 더 보고 기억하려고 할 것 같다. 너무나 잊히고 숨겨지기 쉬운 그 이름을 한번 씩이라도 더 부르다 보면 공예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여성 예술가들이 당연해지는 시기가 분명히 올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