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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은 연극 <멸망의 로맨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인류 멸망이라는 소재는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다. 기후 위기에 관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패딩을 입고 치르던 수능은 어느새 옛말이 되었고, 길었던 이번 여름은 유독 더웠다. 우리가 딛고 사는 지구가 정말로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을까?
연극 <멸망의 로맨스>는 멸망을 앞둔 세상, 남겨진 세 커플의 모습을 통해 멸망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그린다.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는 세 커플의 이야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결국 무엇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보여준다.
연극 <멸망의 로맨스> 공연사진 - 출처 :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인스타그램(@miaricooptheater)
작품은 총 세 가지 시간대로 나누어져 흘러간다.
해수면 상승과 지진으로 인류의 종말이 확정이 된 2030년, 홍이의 아버지는 무작정 반려견 밀크를 데리고 나와 밖에서 나날을 보낸다. 사모님이 훨씬 좋다며 온갖 불평불만을 하는 밀크도,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비를 맞는 아버지를 춥지 않도록 온몸으로 따뜻하게 안아준다.
시간이 흘러 곧 운석이 충돌할 2040년의 어느 날, 홍이는 고등학생 때 첫사랑이었던 종아를 불러 고백한다. 그때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둘. 두 사람은 곧 닥쳐올 종말에 대한 불안과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후회를 품고 처음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홍이와 종아의 시간으로부터 오래 지난 2090년, 남자는 빛의 근원을 찾다 여자와 마주친다. 처음에는 남자를 경계하면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마음을 연 여자.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모든 마음과 정성을 쏟아붓는다.
연극 <멸망의 로맨스> 공연사진 - 출처 :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인스타그램(@miaricooptheater)
서로 크게 관련 없어 보이는 세 커플의 이야기는 극이 진행될수록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얽혀간다. 아버지의 사랑이 홍이와 종아를 도왔고, 홍이와 종아, 두 명의 엄마의 사랑으로 여자는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과거의 사랑이 현재를 돕고 미래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연극의 마지막, 여자와 남자는 함께 문을 열고 극장의 밖, 현실로 나간다. 막연히 먼 미래에서 이야기는 현실로 이어진다. 현재, 2024년의 우리는 무엇에 기대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
최근 몇 주는 멸망이 따로 없는 밤의 연속이었다. 수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불안한 소식, 절망의 가운데에서도 모두가 희망을 품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에는 서로 손 맞잡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수많은 시민이 정의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 모였으며, 그전에는 늦은 밤에도 나서 그날 밤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훨씬 전에는 80년 5월 광주를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가혹한 현실과 모호한 미래 가운데에서도 곁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버텨낼 수 있게 했다.
현실을 버텨내고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이며 인류의 로맨스가 아닐까.
멸망한 세상, 그리고 사랑을 그려내는 연극 <멸망의 로맨스>는 12월 22일까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수많은 현실의 고난과 미래를 향한 불안함이 공존하는 이 시대,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