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숭고'에 대한 아도르노의 칸트 수용 전략을 해석하는 두 가지 가능성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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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숭고 범주의 내포를 질적으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칸트의 숭고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 전략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대표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하나는, 아도르노의 숭고는 비동일자의 특수성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이다. 다른 하나는, 하버마스의 핵심 테제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한 상호주관적 이성 담론'에서 이해될 때 아도르노의 숭고가 가장 유효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논의이다.
두 논의는 아도르노가 예술의 영역에서 설명하는 숭고 개념을 다루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분석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숭고 논의에 대해 전자는 리오타르의 숭고론과 유사한 측면에서 다루는 벨쉬(Wolfgang Welsch)의 주장이며, 후자는 아도르노의 숭고를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적 테제'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벨머(Albrecht Wellmer)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먼저 전자의 측면은 다음과 같다. 벨쉬에게 아도르노의 숭고란 리오타르의 숭고가 가진 속성을 공유하는 개념으로, 숭고란 '무한한 부정성'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리오타르는 숭고에서 이질성과 단절이라는 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에서는 인간적 의미를 초월한 순수 생명력의 강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벨쉬는 아도르노의 숭고 역시 그것을 통해 의미의 단일성은 깨지고 무한한 의미의 개방을 일어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후자의 측면은 다음과 같다. 벨머는 아도르노가 설명한 내용에 따라, 역사적으로 자연에서 예술로의 숭고가 '이식'되었다고 설명한 점에 주목하여 숭고한 현대 예술에서 나타나는 정신화(Vergeistigung), 즉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간에 활발한 상호 침투는 일종의 미적 종합에 대한 부정이다. 즉, 아도르노의 숭고 경험은 객관적으로 보증되어 온 의미가 상실되는 '획기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것만 살펴보면 벨머의 해석이 벨쉬의 해석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벨머는 단호하게 아도르노의 숭고 개념이 의사소통적 합리성(하버마스의 핵심 테제)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아도르노의 숭고가 가진 부정성의 경험을 통해 의사소통적 의미가 공유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주체들이 고정된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서 그것의 확장이 일어나는 일종의 '미적 경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규정 방식에서는 특수에 대해 보편이 가하는 강제적 통합 및 폭력으로부터 젖항하는 계기가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힘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방향성이 아도르노의 숭고 논의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에게 있어 숭고의 경험이 지닌 함의는 결국 주관과의 관계 재정립을 통한 '주체의 반성'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숭고가 의사소통의 맥락에서 합의라는 귀결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에게 숭고의 경험이 반드시 합의로 귀결되지는 않을지라도 더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은 그러한 경험이 주관의 인식 메커니즘에 환원되지 않는 객체의 고유성을 보존한다는 점, 그리고 주관만이 독점적으로 객관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객관 역시도 주관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주관이 축소되는 경험이지만 실제로는 인식 주관이 자신의 실제적 조건성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이유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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