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그들의 서사 - 치유의 미술관

글 입력 2024.11.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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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치유의 힘이었다. ‘치유’ 안에는 공감, 위로와 격려, 깨달음, 성장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 하나만 경험해도 치유가 되기도 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음악, 소설, 에세이, 시, 그림, 사진을 통해서도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도서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의 저자 윤현희는 임상심리학자로 미술계를 심리학으로 풀어낸 여러 저서를 통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은 화가 16인의 내면과 삶, 작품들을 심리학으로 풀어낸 책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헤르만 헤세,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 뭉크, 파블로 피카소, 에곤 실레, 페더 세베린 크뢰위에르, 피에트 몬드리안, 베르트 모리조, 수잔 발라동,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바실리 칸딘스키,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랜마 모지스, 앙리 루소까지 누구나 알 법한 화가들의 서사를 쉽고 재미있게 그려냈다.


읽으면서 미술 관련 저서보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 정도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책 제목에 ‘마흔을 위한’이라는 문구가 있지만, 연령대 상관없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따라서 2024년 그리고 2025년을 맞이할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꼽아 공유해본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그들의 서사


 

치유의 미술관_표1.jpg

 

 

빈센트 반 고흐의 서사. -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빈센트 반 고흐는 성직자가 되길 바랐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벨기에 보리나주에서 사역 활동을 했다. 제공받은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양보하고, 모금 운동을 벌여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선교 단체는 감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심지어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며 그를 배척했다. 결국 그는 종교인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됐고, 사이가 좋았던 아버지와도 불화가 일어났다. 사랑했던 여성들에게까지 거부당했음에도 그의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역 활동을 하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을 그려 세상에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서든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가 아를에 간 뒤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갈망했던 예술가로서의 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조울증을 겪는 빈센트 반 고흐의 모습이 있었다. 1888년에는 화가들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해 노란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폴 고갱을 초대하여 함께 생활했다.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 폴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탄생한 작품이 ‘별이 빛나는 밤에’이다.


그는 가족, 이성, 동료, 종교인에게 외면당했음에도 지치지 않고 인간을 사랑했다. 그의 인류애는 훗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내 시선에서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갈 정도로 내면이 단단하고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인물로 보였다. 마음의 병은 강하지 않아서 또는 내면이 단단하지 않다고 해서 걸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강하고, 단단한 사람도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무너진다.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조울증을 겪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갔을까. 그럼에도 끝까지 그림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안쓰러웠다. 그 시대로 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에드바르 뭉크와 에곤 실레의 서사. - 프로이트는 마음의 기능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언어적 사유 연상법을 택했다고 한다. 자유롭게 연상하는 단어들의 관계와 의미, 기억을 검토하여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만으로도 마음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상처를 언어로 표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에드바르 뭉크와 에곤 실레는 그림으로 표출했다.


에드바르 뭉크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고, 가족들을 병으로 잃었다. 대인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고, 사랑의 실패를 거듭했다. 유년 시절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뭉크는 어두운 세계관을 갖게 된다. 자신의 세계관을 작품에 표출했고, 그림을 통해 고통마다 이름을 붙였다. 그중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절규’라는 작품이다.


저자는 불안을 정면으로 대결해 싸우거나 익숙해져서 복속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 뭉크는 정면으로 대결해 싸우는 쪽을 택했으며, 그 방식은 안정된 대처법이라고 적었다.


자기 내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고통에 그림으로 이름을 붙였던 뭉크의 행동은 치유의 과정이었던 거다. 매우 현명하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에곤 실레도 에드바르 뭉크와 비슷했다.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는데, 그때 에곤 실레의 나이는 10세 무렵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자 에곤 실레의 내면은 애도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물들었다. 한편 에곤 실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이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 어머니와의 애착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소년은 쓸쓸하게 자랐다.


저자는 성애에 대한 관심이 싹트던 시기에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음을 맞은 일은 끔찍한 양가감정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트라우마와 부정적인 경험을 치유하지 못하고 성인이 되면, 그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당시의 상처받은 아이가 튀어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에곤 실레의 내면에는 14세의 소년이 오래오래 웅크리고 있었을 거라고 적었다.


그때 받은 영향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에로티시즘의 작품을 선보이며 유럽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나도 에곤 실레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을 보며 불쾌함과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 화가의 작품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서사를 알게 되니 그의 작품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에 소개된 그림을 다시 보니 여전히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불쾌함은 가셨다. 오히려 세밀하고 예리한 에곤 실레만의 시선과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는 몸의 언어로 자신의 아픔을 분출하고, 기록했다.


클림트가 소개한 에곤 실레와 같은 또래인 노이질을 만나면서 그는 변화했다. 그에게 노이질은 조력자였다. 노이질 덕분에 정화하기 시작한 그는 감옥신세를 지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다시 퇴폐적인 세계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림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의 화풍도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자연주의적이고 편안한 스타일로 변화했다.


에드바르 뭉크와 에곤 실레는 고통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했다. 용기 있게 자기내면을 직면하여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내면의 성장이 일어난 사람은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의 성장은 그림에서 드러났다. 그 덕에 그들은 지금까지도 주목받는 대가가 되었다.


폴 세잔과 앙리 루소의 서사. - 폴 세잔은 파리의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개최한 전시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비난으로 가득했다. 이 일로 그는 파리에서 벗어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갔다. 폴 세잔도 빨리 인정받아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다면성의 진실을 알리고 싶은 열망을 이기지 못했다.


정물화를 단일 시점으로 그렸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세잔이 시도한 복수 소실점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세잔은 사과를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사과에 집착한 결과 세잔은 복수의 소실점을 도입한 주인공이 되었다.


앙리 루소는 가난했으며, 주류와 동떨어진 화가였다. 주말마다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 수목원에 갔다. 그곳에서 그림과 식물을 관찰하며 그림을 독학했다. 다른 화가들이 상상력이 고갈되면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할 때, 루소는 수목원에서 아프리카의 풍경을 상상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눈치 보거나 주눅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색을 찾아 그림에 담아냈다.


그 결과, 신선함과 독창성을 담은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영감과 신선함, 힐링을 선사하고 있다.


폴 세잔과 앙리 루소는 독특한 자신만의 시선과 방식을 고수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비난만 받던 분위기 속에서도 중심을 잡으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고독하고 험난했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화가가 되었다. 성공도 그냥 성공이 아니라 특별한 성공을 맞이한 셈이다.


두 화가의 서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용기와 응원을 주는 이야기였다. 주변에서 원하는 직업, 경력, 삶에 기준점을 두지 말고 자신에게 기준점을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안겨준다. 주변에서 “우와!” 하는 그런 삶이 아닌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알아주는 날이 올 것이다. 혹, 그런 날이 오지 않더라도 ‘내’가 알아준다면 괜찮다.


발타사르 카를로스. -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궁정화가였다. 말이 궁정화가이지, 실상은 광대와 일꾼 사이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어느 날,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당시 유행했던 기법으로 교황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이탈리아 화가들은 감탄했다. 이 일로 유럽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벨라스케스는 신분이 올라가고 대우 역시 달라져도 자신의 옛 처지를 잊지 않았다. 노예와 광대에게 ‘우월감’이 아닌, ‘역지사지’로 공감했다. 특히 자기 조수이자 노예였던 파레하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그 초상화를 교황의 초상화와 나란히 전시했다. 그리고 그는 파레하를 노예에서 화가로 거듭나게 했다.


여기서 저자는 벨라스케스의 공감방식에 대해 짚어냈다. 그는 우월감으로 한 공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공감을 했다. 벨라스케스의 진정한 공감은 광대를 감동시켰고, 노예였던 사람을 화가로 성장하게 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현대인의 공감을 떠올렸다. 평소 공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서글펐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을 때,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개성이나 MBTI의 T로 합리화하며 공감의 본질과 중요성이 변질되는 현상을 보면서 씁쓸하고 속상했다. 이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공감했다고 우기며 도리어 남 탓을 하는 흐름이 계속된다면, 살기가 더 팍팍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공감 능력이 낮은 인간의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벨라스케스처럼 진정한 공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상처를 숨기는 것보다 표현을 선택한 그들의 결말


 

이 글에 소개한 화가부터 소개하지 않은 화가들의 서사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상처를 꽁꽁 숨기지 않고, 직면하고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소외감을, 에드바르 뭉크와 에곤 실레는 결핍과 트라우마를, 폴 세잔과 앙리 루소는 외로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승화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치유했으며, 그 치유의 힘은 그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들이 그림에 남긴 치유는 영원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내 현재까지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벨라스케스 또한 마찬가지다. 허드렛일을 도맡아가며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약자들의 그림을 그리며 과거의 설움을 치유했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화가들을 선별하여 한 편의 글에 적었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화가들의 상처를 대하는 방식을 배우고, 닮길 바랐다. 잘 그리지 않아도 좋으니 그림으로 자신의 상처를 표현해 보면 어떨까. 그림이 아니더라도 글이나 사진, 춤, 노래로 표현해도 좋다.


꼭 문화예술이 아니어도 된다. 요즘 현대인이 많이 하는 SNS로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행복한 순간들을 SNS에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기록한다면 더욱 다채로운 SNS 문화가 될 테다. 이 방법들도 어렵다면, 가까운 사람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건강하게 상처를 마주하고 표현했으면 한다.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관계가 더 깊어지듯이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밖으로 꺼내어 대화를 나눈다면, ‘나’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리라.

 

 

 

필자의 tmi


 

위에서 매우 희망차고 밝게 썼지만, 사실 매우 아픈 상태다. 어느 정도냐면, 충동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도 있었고 기억력, 집중력, 이해력도 떨어졌다. 평소 하지 않던 실수나 행동도 했다.


서른과 가까워지던 시기에 어릴 때부터 있었던 상처들을 마주하며 성장했었다. 그러나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걸 한 만큼, 미숙한 부분도 많았다. 그에 대한 결과로 성장통을 계속 겪고 있다. 깨달았던 부분을 망각하여 또다시 문제를 맞닥뜨렸고, 놓쳤던 부분들을 발견하는 중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면에 힘이 있다, 강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참 이상했다.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진짜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전에 기고한 글에 적은 1%의 빛을 찾으려는 나의 성향 덕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다는 쪽이 정확하겠다. 그것은 ‘글쓰기’였다. 부정적이고, 자극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던 나는 글이 좋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내 마음을 글로 썼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을 때마다.


한글을 열어 여과 없이 무작정 생각을 적은 다음, 전체 선택하여 Delete 키를 눌렀다. 요즘은 바로 지우지 않는다. 일단 저장한 다음, 며칠 또는 한 달이 지나고 지운다. 지우는 시점은 점점 늘어나기도 하고, 갑자기 앞으로 당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체에 거른 내 생각이나 마음을 기록한 글을 쓰기도 하고, 지금처럼 무언가를 보고 느낀 점을 담은 글을 쓰기도 한다. 이 모든 글들은 상처 받는 상황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줬다.


여전히 아프고 상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콩알만큼이라도 꾸준히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강득라.jpg

 

 

[강득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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