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즉 공상과학은 과학적 이론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장르를 뜻한다. 그렇기에 주로 먼 미래 혹은 가상세계를 배경으로 전개되며, 로봇이나 우주 같은 특수한 소재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인터스텔라>, <매트릭스>등이 대표적인 SF 영화로, 최근에는 천선란, 김초엽 작가 등이 유명세를 치르며 문학에서도 SF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SF는 가장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룸과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든 문학은 결국 ‘인간다움'에 기본을 두기 때문이다.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SF는 소설이라기보다 과학적 추측에 근거한 논문 혹은 판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SF 속 인간들의 모습은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생태계의 종말 이후의 지하 도시를 다루는 SF 소설 <이끼숲> 에 담긴 현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름다운 죽음의 잔해, 바다눈
천선란 작가의 <이끼숲>은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생태계의 종말로 더 이상 지상에 살 수 없게 된 인간은 지하 도시라는 새로운 터전을 구축한다. 지하 도시는 닫힌 공간이기에 모든 인간은 위원회의 통제 하에 생활하며,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 활동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챕터 ‘바다눈’의 주인공 '마르코'는 생명공학 연구소의 경비원으로 막 취직한 신입이다. 우연히 같은 신입 '은희'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 마르코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은희에게 빠져든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복적인 대타 근무에 의문을 갖던 마르코는 곧 선배 '커커스'를 포함한 경비 직원 30명이 임금 인상 파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마르코는 점차 말수가 줄어드는 커커스를 걱정하기도 잠시, 은희와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에 집중한다.
건강이 악화되던 커커스는 쓰러지고, 회사는 직원들에게 임금 협상은 무산되었으나 내년도 임금은 대폭 인상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해의 마지막 무렵 마르코는 회사의 부도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바로 새 회사에 취직한다. 새 회사는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은 직원들을 가엽게 여겨 전부를 고용할 예정이지만, 이전 회사가 약속한 임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선언한다.
비슷한 시기에 은희가 사라진다. 은희는 치매 걸린 엄마를 홀로 모시고 있었고, 약 값이 필요했고, 마르코가 반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은희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는 친구가 보던 아바타 영상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아바타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고유한’ 목소리이기에 가치가 매우 높다. 그 목소리를 들은 마르코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은희가 사라진 것과 파업이 끝나고 새 회사가 설립된 일은 별개의 일이지만 무관하지 않다. 또한 새 회사와 새 계약서를 쓰고 마치 아무 일 없던 것 같은 일상을 보내야 할 마르코를 우리는 원망할 수 없다.
우리는 뉴스에서 '00노조 총파업'과 같은 뉴스를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파업의 규모와 목적은 제각각이지만, 목소리를 낼 용기는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임을 사회 초년생의 입장에서 몸소 실감하는 요즘이다. 지하 도시의 강압적인 통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이 더욱 단단한 법이다.

“바다눈이라는 건, 커다란 바다 생물의 사체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나 미생물이 눈처럼 내려서 붙여진 이름이야. 죽음의 잔해라는 거지.”
바다 생물의 잔해인 바다눈은 심해에 내리는 눈과 같은 현상으로, 큰 고래가 죽을 경우 바다눈이 몇 년 간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커커스와 은희의 발버둥은 헛된 것이 아닌 눈처럼 아름답고 죽어서도 오래도록 지속될 싸움이라고 믿는다.
늪에서도 목소리를 외치자, 우주늪
<이끼숲> 속 지하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인구계획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사전에 보고한 만큼의 자녀만(그마저도 기준 소득 이상의 가정만이) 낳을 수 있으며 15살이 지나면 독립해 각자에게 배정된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두 번째 챕터 <우주늪>는 '의조'가 자신의 쌍둥이 형제 '의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다. 철저한 계획과 통제 아래 유지되는 세계에서 의주와 의조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부모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를 사실대로 위원회에 보고했을 때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으나 모두가 알기도 했다. 그렇기에 의주와 의조의 부모는 한 아이의 출생만을 보고하기로 선택한다. 의조는 그렇게 평생을 방 한 칸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지냈다. 의주는 늘 의조의 눈치를 보고 의조는 그런 의주가 맘에 들지 않음에도 계속 눈치를 보길 원한다. 의주는 의조를 대신해 선택받은 아이이기에, 자신이 화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의조는 방 안의 환풍구를 뜯고 들어간다. 처음에는 그조차 무서워 배관 통로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던 의조는 점차 도시 전체를 활보하기 시작하고, 좁은 통로를 기어다니며 자신만의 ‘바깥 일’을 만든다, 늘 궁금하던 의주의 바깥 생활처럼. 우연히 의주의 친구 '치유키'를 만난 글을 배운 의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환풍구 통로에 이정표를 만드는 일이었다. 냉동식품 창고와 배설물 정화 시설로 길을 잘 못 들어 죽을 뻔한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배관 통로를 지나던 의조는 자신의 쓴 "위험" 표시 아래에 누군가 쓴 “고마워요”라는 표식을 발견한다. 아무리 답답해도 나오지 않았던 울음이 처음으로 의조의 눈에서 흘렀다.
“의주야. 내 핑계는 이제 그만둬. 네 삶에서 나라는 이유를 계속 붙이지 마. 너는 꼭 네가 행복하면 내가 싫어하는 줄 알더라? 근데 사실 맞아. 아까까지는 그랬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나는 이제 싸울 수 있어. 이게 도대체 무슨 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너도 이제 마음껏 행복해 봐, 어디. 있는 힘껏.”
세상에 없는 존재인 의조는 자신과 같은 단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 나갈 힘을 얻는다. “고마워요”씨를 만나고, 어딘가에 있다는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폭탄을 찾아 날려버릴 결심을 한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먼저 변화가 시작되는 곳은 가장 낮은 곳이다. 사회의 위에 있는 사람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급 사회가 평등 사회로 바뀌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여성이 참정권을 얻게 되었을 때도 제일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바쳐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책의 의조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곳보다도 더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애초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목소리를 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싶지만 의조는 그렇게 하고자 결심했다. 그런 의조처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크기로 원하는 미래를 향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 목소리의 크기와 상관없이, 침묵이 아닌 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것만으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서로를 구하는 세상을 향해, 이끼숲
마지막 챕터 <이끼숲>에 등장하는 ‘유오’는 생태계의 멸종으로 구축된 지하세계에서 식물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책과 소문을 통해서만 본 식물을 누구보다 간절히 탐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유오는 바오바브나무의 뿌리가 내려와 잘라내야 했다는 건설회사 직원의 말을 듣고 무작정 건설업에 지원한다. 나무뿌리에라도 가닿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하 도시는 그 특성상 온갖 미생물과 토질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보수해야 하며, 더 단단한 곳을 향해 계속해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땅을 파는 건설 회사에서는 하루에도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건설 회사와 위원회는 사고를 예방하기보다 사후 대책에 힘을 썼다. 사고 시 신체를 이식할 수 있도록 직원들과 똑같은 클론을 만드는 것이었다. 안전을 신경 쓰는 것보다 클론을 만드는 것이 더 쉽고 저렴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그 숫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되었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제야 알았던 것뿐이다. 층별 광장마다 있는 건설 사고 카운트 전광판은 만들어진 이래로 단 한 번도 ‘0’이었던 적 없단 사실을. 나는 언제나 그 애가 전광판에 뜬 ‘1’이 될까 봐 무서워하면서도 그 상상을 끊임없이 했다.”
오랜 기간 유오를 좋아한 친구 '소마'는 통신국에서 일하며 통신 기록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사람들의 통신을 도청하고 감시하는 것이 소마의 일이었다. 소마는 한쪽 이어폰으로 일을 하는 한편 다른 이어폰으로는 늘 건설 회사의 무전을 훔쳐 들었다. 그러면서 매일 유오의 죽음을 상상했다. 누구보다 유오가 죽지 않길 바라면서.
결국 사고로 유오가 죽은 뒤 유오의 클론이 폐기되기 직전, 소마와 친구들은 클론을 온실로 데려갈 계획을 세운다. 클론은 유오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고 온갖 식물이 가득하다는 온실은 그 누구도 본 적 없지만, 그럼에도 식물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보고 싶어 했던 유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소마와 유오의 클론이 온실에 도달했을 때, 식물들은 이미 전부 죽은 상태였다. 그곳에서 만난 지하 도시의 위원장은 아무리 심어도 식물들이 매번 죽는다고 했다. 해탈하기도 화가 나기도 한 듯한 그녀는 어차피 밖으로 가는 인간은 쫓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소마에게 지상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준다.

“숲까지 죽지 않고 걸어왔다. 어쩌면 그녀는 이끼를 한 번도 밟아본 적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도 밤이 되면 빛나는 이끼와 밤하늘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망가질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거야. 어떤 이는 밤하늘과 숲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걸, 그런 인간들이 모여 또다시 끔찍한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짐작했을 것이다.”
유오의 클론을 업은 소마가 도달한 지상에는 인공 잔디와 인공 별이 아닌 진짜 이끼와 진짜 별, 움직이는 벌레가 있었다. 지상에는 태풍도 모래바람도 없었다. 다만 약간의 악취와 대지를 뒤덮은 이끼, 거대한 숲이 존재했을 뿐이다.
유오가 죽은 뒤 오랜 시간 괴로워했던 소마는 비로소 유오의 클론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오늘날의 사회도 이 책의 지하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뉴스의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유독 길었던 여름과 갑작스러운 폭설을 통해 기후 위기가 현실이 되었음을 몸소 체감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뎌지거나 절망하기보다 끊임없이 슬퍼하길 바란다. 슬픔을 진정으로 느끼고 마주할 때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하지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구한다는 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막는 것인데 나는, 우리는 언제나 일이 일어난 뒤에야 그곳이 위험했음을, 우리가 위태로웠음을, 세상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안다. 항상 먼저 간 이들이 남은 자들을 구한다.”
<이끼숲>을 쓴 천선란 작가는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각자의 삶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은 때때로 위태롭고 무척 불안하다. 이 책을 통해 헛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꿈을 간절히 바랬던 유오, 그런 유오의 꿈을 이뤄주고자 한 소마, 자신만의 우주를 개척하기로 결심한 의조,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현실을 감내한 의주와 마르코를 보며 생각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을 막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에 보다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작가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