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뒤에서 걷는 자는 앞선 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 달의 뒷면을 걷다

이 세상 수많은 '디오티마'들에게 헌정하는 책
글 입력 2024.11.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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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에는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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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진 작가의 ‘달의 뒷면을 걷다’는 1990년대, 대한민국에 순정만화 로맨스 공식을 깨고 SF라는 바람을 불러일으킨 권교정 만화가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재해석한 SF 소설이다. 순정만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원작을 오마주해 존경의 뜻을 담아 만들어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원작의 핵심 인물인 ‘디오티마’를 이름으로 가진 ‘디오티마 우코’. 일명 ‘다이(Di)’라고 불리는 2066년생의 10대 소녀다.


먼 것 같기도, 가까운 것 같기도 한 50년 뒤의 이 소녀는 달에서 태어난 인간, 즉 ‘월인’이다. 과거에서 그 세계를 읽어내리는 지구인으로서도 낯설지 않게 생각해 볼 법한 개념이었다. 이미 많은 어린이가 초등학교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에서 우주복을 입고 있는 인류, 달에서 살고 있는 인류를 그려 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인류나 50년 후의 인류가 달에서 아이를 출산했다고 해도 인류의 기술 발전에 감탄하며 그 아이의 미래를 마음껏 상상해 볼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고 기절초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류는 거기까지만 생각할 수 있다. 미래의 인류가 아닌 현재의 인류들이 생각한 달에서의 삶은 지구의 6분의 1밖에 안 되는 저중력에서 붕붕 뛰어놀거나, 달 탐사 로봇, 혹은 달 전용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삶일 것이다. 오로지 머릿속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삶을 꽤 구체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은 사람이 갖고 있지 않다. 그 속에서 전혜진 작가는 ‘월인’들의 삶을 마치 달의 표면에서 관찰하듯이 서술했다.

 

전혜진 작가가 서술한 ‘월인’들은 생명체는 환경에 맞춰 생존을 위해 진화한다는 다윈의 이론을 증명하듯이 ‘지구인’과 다른 신체를 타고났다. 저중력에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지구인보다 약한 심장과 폐, 뼈와 살을. 따라서 그들이 지구에서 온 이들에게서 태어난 몸인데도 지구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은 필연적이었다. 단순히 연상만 해봐도 줄어들어 있는 고무줄을 늘이는 것보다 늘어난 고무줄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설 속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갈등이 등장한다. 다이가 ‘월인’으로서 ‘지구인’의 이기심에 대항하려는 갈등과 원작 속에서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계승되고 있는 위대한 영혼이 제 이름이 되어버려 정체성과 삶의 방향에 있어 혼란을 겪는 다이의 내적 갈등. 전혜진 작가는 ‘월인’과 ‘지구인’이 대립하는 갈등을 필두로 이 서사를 풀어나가고 있다.

 

 

 

개척자는 땅의 주인이 아니다


 

단 5명. 소설 속에서 이 월인들은 총인구 5명이라는 극도의 희귀성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3명은 사망하고 2명만이 살아남아 있다. 다이는 이 두 명 중 한 명의 ‘월인’이다. 이것만으로도 다이는 전 지구인이 아는 존재이자 존재 이유만으로도 인류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특별한 존재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약자의 집단에 속해있는 다이에게 굳이 생산력 있는 노동자, 혹은 사회인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기만 하라는 것도 보기에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이 굉장히 이기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쉽지 않다. 몇몇 지구인들은 그저 살아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굳이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발언들을 지금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배려가 무조건 선하지는 않듯이, 지구인들이 행하는 배려는 아주 이기적이다.


다이는 그 속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한다. 우주를 동경해 달에 깃발을 꽂고 도시를 세우고 아이를 낳기까지 했지만, 그로 인해 달이 본인들의 땅이라도 된 줄 알고 각종 방사능 쓰레기를 달에 매립하겠다는 판결이 나니 현지인으로서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다이는 그 주장 위에 현수막을 걸치고 ‘달은 지구인들의 쓰레기통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저항한다. 월인이 태어난 이상 달은 지구인보다 월인의 땅이라고 보는 게 맞을 터인데 지구인들이 개척자라는 이름 아래에서 멋대로 손을 뻗치는 꼴이 몇십 년 전의 지구에서 읽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현실적이라 좀 웃기긴 했다.


두 명 남은 월인 중 한 명, 비율로 치자면 월인의 50퍼센트가 반대 의견을 피력하지만 절대 인구수와 나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가로막혀 다이의 목소리는 그닥 힘을 내기 어렵다. 그저 경찰서에 들어가도 듣기 좋은 잔소리와 훈방 조치로 풀려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는 목소리 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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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혼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진화를 거듭한다는 것이.”

 

- 115p.

 

 

지구인들이 다이에게 쥐여주고자 했던 삶은 그저 안전만을 영위하며 가만히 예견된 소멸을 기다리는 삶이다. 그러나 다이는 본인에게 주어지려 하는 그 삶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부정한다. 끊임없이 본인의 삶을 위해 나아간다.

 

 

 

이름에는 기대가 있다


 

이와 더불어 다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다이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 바로 ‘디오티마’라는 이름이다. 달의 뒷면을 궁금해했던 그리스 여성이자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에 도달한 존 H. 서얼의 별명. 그리고 다이의 이름.

 

이름에는 언제나 기대가 숨어있다. 그건 태어나 처음 갖는 이정표와도 같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건강과 병약 사이에서 더 좋은 길로만 가라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정표대로 살아갈 아이의 의지만큼은 단 한 톨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에게 이름대로 살아가라는 말은 가끔 무책임할지도 모른다. 이름대로 살아갈 책임은 어쩌면 이름을 받은 아이가 아니라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에게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러나 때때로는 원치 않은 숙명이 생기기도 한다. 자유와 방종은 언제나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상황의 주체가 본인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불어 ‘디오티마’라는 영혼은 환생을 거듭하며 진화하는 특수성을 띠고 있어 다이에게는 그 이름으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담과 속박이 있는 게 당연하다.

 

누구나 제가 가진 환경과 이름에 대해 한 번씩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왜 이런 이름을 지어줬지, 왜 이런 흔한 이름, 혹은 특이한 이름을 지어줬을까, 하며.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이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아 시기와 질투를 할 때도 있다.

 

소설 속 다이도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같은 의구심을 품었다. 여느 사춘기 아이처럼 제 이름이 왜 ‘디오티마’냐고 지어준 이에게 달려가 소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구하고자 해야만 보이는 법이다. 다이 또한 그러한 외침을 거치고 나서야 제 이름의 원작자와 대화하며 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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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바람과는 달랐다.

가장 앞선 사람이 되라는 바람과도 달랐다.

그것은 그저 몇 번이나 길을 잃고 넘어지더라도, 자신을 믿고 네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을 바라보는 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122p.

 

 


결국 나아갈 줄 안다는 건


 

누군가는 이런 다이의 의지나 반항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희소성과 일말의 책임감이 보장해 준 편안한 삶을 거부하는 것이니 말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 굳이 무언가를 책임지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고 그저 있는 환경에서 의식주를 영위하기만 하면 되는 삶. 지금도 이 지구의 누군가는 이런 삶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걸 원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군가가 개척하고 발견한 영역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나아가고 쟁취하는 자의 앞모습을 보기는 그보다 앞선 자가 아니면 보기 어렵다. 따라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는 뒤에서는 섣불리 그런 자의 속마음을 판단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저 궁금해할 뿐이다.

 

그러니 나아간다는 것은 뒤를 살펴 제 그림자 뒤를 따라올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스스로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스스로만이 아는 얼굴을 하기 위해서. 그건 제게 주어진 이름에서 탈피하는 길이자 제 이름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또 진정으로 궁금한 것들을 찾는 일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기어다니는 애벌레라고 해서 재빠르게 달리는 치타의 삶보다 가치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중요한 건 ‘나아감’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쟁취할 줄 알고, 궁금한 게 있으면 탐구할 줄 알고, 불편한 게 있으면 개선할 줄 아는 성질을 갖는 것. 이는 곧 순환이며, 부패를 방지하는 길이다.

 

그리고 나아가며 생기는 그 그림자는 무엇보다 빛날 것이다. 사람들이 앞선 자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앞선 사람 또한 뒷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그림자와 발자국을 보며 수없이 깊은 안정감을 가질 것이다.


지금껏 나는 어떠한 그림자 속에 살고 있었는가. 또 내가 나의 얼굴을 갖게 될 길은 어디인가. 고민은 사람을 잠시 머무르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두 발을 가진 인간은 어디든 조금이라도 나아가게 된다. 나만의 길을 걷고는 한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굳이 새로운 개척지가 아니어도 된다. 이 땅에서, 이 우주에서 나의 걸음으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는 마음가짐 하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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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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