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내가 보아온 모든 미디어 속 주인공들은 사랑을 했다. 어떻게든 남자 주인공을 만나고, 어떻게든 사랑을 하고, 어떻게든 보고 싶어 애닳아했다. 한 번도 언어로 자각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런 사랑을 동경해왔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사람들이 그토록 입을 모아 예찬하는 ‘사랑’에 비해 너무 볼품 없었다. 연애 중엔 아름다운 모습만 골라 전시하고, 이별 후엔 추한 모습을 잘라내고 비극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너무나 미화되어 있다고 느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읽게 된 것은 <‘기이한 시대’의 삶과 사랑>이라는 해설 제목에서, ‘기이한 시대’라는 말에 끌려서였다. 그러나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동독과 통일 등의 요인이나,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테마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정열’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1. 형식
이 소설은 굉장히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은 100살 가까이 먹은 할머니가,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중년 시절 경험했던 프란츠와의 사랑을 계속해 반추하는 회고록이다.
그녀는 나이 먹은 노인이지만, 프란츠와의 사랑 전후를 도려내고 그 사랑을 지연하고 그 행위와 시간 안에 영원히 살기를 택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늙어가는 육체를 인지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거울 따위로 눈에 담거나 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그녀가 하는 행위는 오로지 계속해서 반추하기이다.
그녀는 원래 자연사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생태학자였다. 그녀는 기이한 시대 내의 평범한 삶을 살았다. 전쟁과 스탈린주의 통치, 분단된 역사, 독일 외내부의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영영 휘둘리며 살아왔지만, 프란츠를 만난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선택이다. 어느 날 발작을 일으킨 이후 그녀는 그 발작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가상실험이라 여겼다. 그 이후 그녀는 사랑에 대한 욕구가 별안간 해방된 그녀는 간절히 사랑을 고대해왔다.
결국 서독 출신의 개미학자 프란츠를 만남으로써 그녀의 삶 전체를 집어삼키는 사랑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프란츠라는 대상 자체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목적은 ‘사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였다.
2. 진짜 사랑의 추악함
자신의 사랑이라는 행위와 완전히 동화하였을 뿐, 정작 그 대상인 프란츠에 대해서는 사실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이 소설 속의 서술조차도 완벽히 믿을 수 없다. 원형의 이름조차 갖지 못했듯, 그녀의 기억 속에서 프란츠는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는 존재이다.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프란츠를 기억하고 애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순간, 열렬히 몰입했던 사랑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사랑이라는 행위, 그 감옥 속에 영원히 가두길 택한 것이다.
서술자는 프란츠와의 육체적 사랑을 통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동화는 허상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이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자신을 상대의 시선에 각자 내맡기는 계약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지기, 그가 오기를 바라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 가능하게 만들기.
그녀는 프란츠와의 삶만을 진실된 삶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기를 택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프란츠와의 삶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 종국에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녀가 선택하고 도려낸 진짜 삶, 프란츠와의 사랑은 사라진다는 것이 그녀의 인생관을 완성한다. 공룡이 한순간에 멸종하고 발굴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였듯, 인간이 이룩해 오고 기록해 온 모든 것 또한 언젠가 한순간에 사라질 테니. 죽음처럼. 멸망처럼.
당시에 나는 사람들이 공룡의 죽음에 대해서만 흥미를 가지고 공룡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중략) 그렇게 오랜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떤 것이 어느 날 다시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바로 그런 예감 속에서 공룡의 죽음에 대해 논리적이고 유일무이하며 절대로 다시 반복되지 않을 어떤 이유를, 인간들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근거를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인간은 무언가를 남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서술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누구보다 충실한 자이기 때문이다.
서술자의 기억하기와 여타 인간의 기억하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잊히는 걸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택한 방법은, ‘기억되기’이다. 기록을 남기고, 죽음을 애도하고, 삶을 선별해 포장해오는 그들의 모습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영원을 바치는 자기파괴적 선택으로써 ‘사랑’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3. 결말과 숨겨진 비밀
결말 부에서 서술자는 프란츠의 다시 오겠다는 말을 거짓이라 생각해 실랑이를 벌이다, 프란츠가 버스에 부딪혀 죽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이 서술자에 의해 철저히 제어된 상영관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 대상인 프란츠를 파괴한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랑을 동경하는 것 같다. 사랑이 별볼일 없다는, 잔혹한 실상을 부정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고,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내보이는 사랑에 대한 작품들은 나를 더 실망시켰다. 『슬픈 짐승』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남김없이 사랑의 추악함, 그 모두를 보여주었다.
기억의 재구성, 사랑의 미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이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의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게 끝까지 소설을 쥐고 있는 것.
그 파괴적인 몰두가 내겐 차라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슬픈 짐승이어야만 완성할 수 있는 이 잔혹한 사랑이.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영원의 무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