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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 탓일까. 매끄럽지 않고 펜으로 툭툭 그려낸 듯한 독특한 그림체가 눈에 띄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또래 여자아이 두 명이 잔뜩 긴장한 듯 같은 곳을 쳐다보고 있는 어느 영화의 스틸컷이었다.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 만화 〈룩백〉(2021)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도 올해 개봉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후지노’의 등을 보여준다. 제목 ‘룩백(Look Back)’이 암시하듯, 우리는 꼼짝없이 주인공의 등을 지켜보아야 한다.

 

지겹도록 책상 앞에 앉아 무엇 하나라도 꺼내 놓으려 하는 그 장면을 말이다. 이상하게 속에서 울렁거림을 느꼈다. 고뇌하는 이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나? 내 모습도 저럴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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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2024) 포스터

 

 

‘후지노’와 같은 동네에 사는 ‘쿄모토’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다. 다만 히키코모리인 쿄모토는 아주 소심해서 학교 출석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에 후지노는 특유의 엉뚱하고 발랄한 아이디어로 학교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 중이다.

 

사건은 선생님이 후지노에게 한 번만 쿄모토에게도 신문의 만화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냐는 제안으로 시작된다. 그에 후지노는 코웃음을 치며 아마추어에게는 아마 쉽지 않을 일이라며 순순히 구역을 내어준다.

 

진정한 천재를 마주했을 때의 경외심, 자격지심이란. 후지노는 자신과 쿄모토의 만화가 나란히 걸린 학교신문을 읽고 나서 아득한 충격에 빠진다. 초등학생 실력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구도와 분위기를 발산하는 필선 앞에서…

 

순간 후지노에게 이입돼 다시 한번 울렁거렸다.

 

만화라는 공통점 말고는 절대 마주칠 일 없던 둘은 졸업식 당일까지 등교하지 않은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한 선생님으로 인해 결국 만나게 된다.

 

사이가 데면데면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예상과 달리 만화가와 팬의 만남처럼 극적이었다. 사실 쿄모토는 후지노가 그간 연재한 만화의 오랜 팬이었고 ‘선생님’이라고 부를 만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천재(쿄모토)의 벽 앞에서 남몰래 좌절하고 연재 중단을 선언했던 후지노는 팬과의 소소한 대면을 마무리하고 흥분되는 마음을 붙잡은 채, 내리는 소나기도 끄떡없는 힘찬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치웠던 스케치북을 가져와 책상 앞에 앉아 그렇게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일생일대의 순간 이후로 스토리와 인물 스케치는 후지노가, 배경 그림은 쿄모토가 맡아 함께 팀이 되어 만화 연재처에 지원하며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나의 창작물을 기꺼이 향유하고 즐기는 사람을 만났을 적이 생각난다. 그래서 논밭길을 힘차게 내딛던 후지노의 발걸음이 귀여우면서도 공감이 갔다. 그렇다면 쿄모토, 선망하는 대상을 처음 만나 내가 당신의 어디까지 꿰뚫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꺼내 놓고 싶어서 질문과 대답을 늘어놓게 되는 그 아이의 기분도 이해한다.

 

*

 

만약 후지노가 쿄모토의 졸업장을 현관 앞에 둔 채로, 둘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쿄모토의 미술대학 진학을 이유로 사이가 멀어진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대학생으로, 만화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불의의 사고 때문에 쿄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지노는 절망에 빠지고 인기 만화 연재를 중단한다.

 

이 만화영화는 ‘만약에’ 순간까지도 보여준다. 둘은 만나지 않았고, 쿄모토가 어릴 적 후지노의 팬임을 몰랐으며, 괴한이 쿄모토를 해하려 할 때 멋지게 날려 차기로 등장하는 체육학과생 후지노를 말이다.

 

그런데 어느 우주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은 쿄모토가 후지노 만화의 팬이라는 사실이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자신의 만화를 기다리는 팬을 위해 그림 그려야 함은 변함없다. 방 곳곳에 후지노가 연재하는 만화의 포스터, 단행본, 처음 후지노의 사인을 받아 그대로 방문에 걸어둔 겉옷까지. 후지노는 쿄모토가 남긴 흔적으로부터 응원을 받은 듯 자신의 작업실로 뛰쳐간다. 해가 질 때까지 만화를 그린다.


왜 창작을 할까.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쿄모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창작자는 결국 팬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매번 찾아오지만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고마워서 멈출 수 없게 된다.


혹시 힘겹게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창작자라면 애니메이션 〈룩백〉으로 58분간의 진한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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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2024)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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