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달의 뒷면을 걷다

글 입력 2024.10.2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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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달의 뒷면을 걷다.jpg

 

 

순정만화 X SF소설 시리즈 Vol.3


한 사람의 발걸음이 길이 되기까지

 

 

1980년대 '순정만화 붐'을 이끈 순정만화계의 거목 3인과 2024년 현재 SF 장르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3명의 소설가의 만남 '순정만화 X SF소설' 컬래버레이션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순정만화'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SF 소설 속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점들을 녹여낸 강경옥 X 박애진 [라비헴 폴리스 2049], 신일숙 X 듀나 [2023년생]에 이어 시리즈를 완성하는 마지막은 '언젠가 뒤따라올 누군가를 위해 발걸음을 남기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권교정 X 전혜진 [달의 뒷면을 걷다]이다.

 

[달의 뒷면을 걷다]의 주인공은 디오티마 우코, '다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소녀이다. 원전의 주인공인 '진화하는 영혼' 디오티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열여덟의 소녀는 달에서 태어나, 달에서 살다가, 달 밖의 땅은 밟아보지 못하고 죽어갈, 소녀의 말을 빌려 '멸종위기종'이나 다름없는 '월인'이다. 원전의 디오티마가 '생을 거듭하며 진화하는 영혼'의 숙명적인 고단함을 다루고 있다면, 전혜진 작가의 손을 거쳐 탄생한 디오티마는 인간은 물론 달에서 태어난 월인 마저도 결국은 소멸하게 될 폐쇄적 공간 달에서 '필멸'의 숙명을 딛고 자신을 위해,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뒤를 따라올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 한 걸음을 내딛는 인간의 숭고함을 다루고 있다.

 

원전의 오마주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외에도 있겠지만 "원전의 디오티마가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디오티마라 불리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우주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이 이야기는 반드시 내가 써야한다고 확신했다"는 작가의 말을 빌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 [달의 뒷면을 걷다]를 자신 있게 소개한다.

 

 

달의 뒷면을 걷다_펀딩용 SNS 디자인 07.jpg



1999년에 첫 연재를 시작해 완결이 나지 않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순정만화 팬들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않고 회자하며 완결을 기다리는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가 사유하는 인간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알고자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론적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을 반복한 한 '진화하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에서 태어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넓은 세상으로' 나갔고, '세상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었고, 달의 뒷면을 보고 싶었던' 디오티마라는 이름의 여성은 갑작스런 사고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새로운 삶을 반복하는 '진화하는 영혼'이 된다. 그렇게 2000년의 기억을 담고 다시 태어난 새로운 삶의 이름은 '나머 준', 2092년 '달의 뒷면'이 보이는 거대 함선 우주정거장 '디오티마'의 역장이다.

 

전혜진 작가가 2024년의 문법으로 오마주한 [달의 뒷면을 걷다]는 나머 준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달에서 태어난 월인 소녀 '디오티마 우코'에 관한 이야기이다. '디오티마'라는 이름을 들으면 "혹시?"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반발하면서, 달을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수도 없어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월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싸우는 열여덟 소녀 디오티마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의 오랜 팬인 전혜진 작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화하는 영혼'이다.

 

원작의 '진화하는 영혼' 나머 준은 고민한다. 2000년의 세월의 기억을 가진 채로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은 존재하고, 이렇게 영원히 답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영혼의 진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전혜진 작가의 [달의 뒷면을 걷다] 속의 디오티마 우코는 말한다. '진화하는 영혼' 같은 거창한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막연함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내딛는 첫 걸음이 중요하다고.

 

원작의 '광막한 미래를 홀로 나아가는 영혼' 나머 준에게 느꼈던 달큰한 쓸쓸함을 다시 맛보고픈 독자들에게, 혹은 우리가 그때 느꼈던 쓸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답을 찾고픈 독자들에게, 전혜진 작가가 미완의 원작을 향해 찍은 마침표 [달의 뒷면을 걷다]가 오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를 바란다.

 

*

 

SF 영화에 관한 글이야말로 SF 장르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만든 주범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SF라기보다는 인간의 위대함을 담은, SF이지만 감성적인 이성과 감성이 분리되고 SF는 감정과 무관하다는 식의 논조는 SF 장르 '영업'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못지않게 오해 받은 장르가 '순정만화'다. 10대 소녀들이 소비하는 가벼운 로맨스 정도로 대하는 자들은 이 장르에 담긴 무궁한 세계를 모른다. 권교정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오마주한 전혜진 작가의 [달의 뒷면을 걷다]는 'SF'와 '순정만화'의 스펙트럼을 섞고 교차하고 확장한다. 천체물리학을 기반으로 확장한 상상력이 SF가 얼마나 순정만화다울 수 있는지, 순정만화가 얼마나 SF 같은지 보여준다. 장르 이해의 저변을 넓히는 의미에서도 귀한 텍스트라고 감히 표현하고 싶다.


- 임수연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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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진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한 이래 만화, 웹툰, 추리, 스릴러, 사극 SF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을 썼다. 여성의 역사에 주목하는 논픽션인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 [여성, 귀신이 되다],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 소설집 [바늘 끝에 사람이], [마리 이야기], [아틀란티스 소녀]와 장편소설 [280일: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발표했으며 [퍼스트 콘택트], [오피스 괴담], [책에 갇히다], [책에서 나오다] 등 다수의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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