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이라는 우주 속으로 - 해부학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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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인체의 신비> 전이 화제였다. 인체의 가로 절단면, 세로 절단면을 포함해 여러 부위 표본을 보여주는 이 전시는 후일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교육용으로 홍보가 되어서인지 인기를 끌었다. 아무리 교육용으로 홍보가 되었다 한들 꽤 충격적인 기획이었는데도 사람들의 흥미를 끈 것을 보면, 인류 역사에서 해부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아마 금기와 호기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부여받은 생명에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파헤치려 하는 것이 인간이다. 시체는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고 싶다는 욕망은 수많은 사람이 본능을 거스르고 시체를 해부하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해부의 경험과 지식이 쌓여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이만큼 알게 된 것이다.
<해부학자의 세계>는 고대 이집트부터, MRI로 신체 내부를 들여다보는 오늘날까지 5천여 년에 이르는 해부학의 역사를 주요 인물과 그들의 저서 및 삽화로 짚어보는 책이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해부학도 당대 사회의 가치관과 기술의 발전,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따라 정체기를 겪기도 하고 크게 도약하기도 하며 지금에 다다랐다.
철학에서 과학으로
첨단 과학 기술로 인체를 연구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초창기의 해부학은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존재는 물론이고 뇌의 역할과 기능이 거의 밝혀지지 않았을 때이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의 큰 화두는 인간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몸의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였다. 축적된 지식이 없었기에 해부는 서툴렀고 삽화도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앎에 대한 열정만큼은 컸기에 대담한 주장과 발견이 이어졌고 그중 일부는 잘못된 사실인데도 근대까지 진실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해부학이 과학의 영역이 된 것은 고대를 지나 중세로 넘어오면서부터다. 사람들은 이제 해부로 실제 병을 어떻게 고치는지, 특정한 근육이 우리 몸의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지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해부학은 정체기를 맞기도 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해부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관련된 서적과 지식은 당시 왕성하게 발전하던 이슬람왕국으로 전파되었다가 중세의 끝무렵에야 유럽으로 역수입되어 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해부학 서적에 실린 삽화의 변화는 해부학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자료다. 해부학적 지식도 부족하고 그마저도 동물 해부를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았던 고대의 삽화는 자세도 부자연스럽고 비례도 맞지 않는다. 사람이라기보다 개구리에 가까운 모습, 일곱 개의 방이 있는 자궁의 모습에서 시작해 점점 우리가 교과서에서 봐 왔던 인체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걸 보는 즐거움이 있다.
해부학과 예술의 공생관계
이 책에서 만난 의외의 사실은 해부학이 예술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해부에 참관하는 사람은 훌륭한 화가일 필요도 있었다. 카메라도 방부처리 기술도 없던 시절이라 시체가 썩기 전에 재빨리 최대한 상세하게 묘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7세기쯤 되면 삽화는 정보를 알리는 기능을 넘어서 예술적인 성격도 띤다. 이제 해부학 서적 속 인체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자세와 섬세한 묘사로 독자가 필요한 정보를 전한다.
또한 해부학은 의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르네상스에 접어들자 조각가, 화가에게도 해부학은 중요해졌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러 차례 해부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다방면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빈치 역시 해부학 삽화를 여럿 그렸다. 이 시대에는 예술가를 위한 해부학 서적이 따로 출판될 정도였다고 하니, 해부학이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이 인간 존재의 마음과 정신을 파헤치는 행위라면 해부학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헤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둘은 묘하게 닮았다. 호기심과 금기를 동반한다는 것도 비슷하다. 어쩌면 예술이든 해부학이든 그 동기의 뿌리는 같을지도 모른다.
해부학이 바꾼 것들
해부학의 발전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좀 더 알게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고 그것은 새로운 생활양식,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과학은 사회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베살리우스는 해부로 여성과 남성의 갈비뼈 개수가 같다는 걸 밝혔는데, 이는 남성이 가진 여분의 갈비뼈로 여성이 탄생했다는 교회의 통념과 어긋났기에 사회에 파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해부학은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믿음에 균열을 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해부학이 언제나 윤리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시체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시체 도둑이 악명을 떨쳤다. <인체의 국소 해부학>을 쓴 에두아르트 페른코프는 나치 지지자로, 저서에 쓰인 이미지가 나치 체제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몸이라는 게 밝혀져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인체의 신비> 전은 전시 표본을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구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누군가의 시체를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논의해볼 필요가 있기도 하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에는 직접 시체를 해부하지 않고도 인체를 연구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미래의 해부학은 정작 해부의 비중이 매우 축소된 학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해부학의 이름이 왜 해부학인지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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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우리는 더 이상 심장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감정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뇌와 호르몬의 농간인 것도 안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의 몸은 신비롭다. 5천 년을 연구했지만 여전히 뇌는 수수께끼 가득한 신체 부위이다. 기술이 발전하며 세포 단위로도 인체 관찰이 가능해지며 해부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기도 하다.
언젠가는 인간의 몸을 낱낱이 밝혀내는 날이 올까. 정신적인 부분을 포함해 우리의 몸에 일어나는 온갖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정확한 이유를 붙일 수 있다면, 우리가 인체를 보는 관점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여전히 몸은 상당 부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해부학으로 얻을 수 있는 '아는 즐거움' 못지 않게, 그 '모르는 즐거움' 역시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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