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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sasa
{Jellyfish Monologue}
4. 홀로 남은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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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저마다의 빛깔로 헤엄치는 바닷속. 해파리는 파도가 부서진 자리를 투과한 빛줄기 아래에 떠 있다. 몸을 감싸는 난류를 잘못 만난 자석처럼 밀어내며 허공에 우뚝 서 있다. 오래전 사라진 길목에 남은 외딴 표지판처럼, 시간이 멈춘 듯 차분하게.
나는 해파리 마음속 광활한 어딘가에 독백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처럼 서 있다. 맥박 소리가 귓가에 닿는 고요 속에서 내면의 일을 주시하는 중이다. 뒷짐 진 손을 독백의 투명한 벽에 대고선 불안을 기다린다. 불안을 기다린다? 왠지 슬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불안은 이미 잦은 조우로 완성된 암묵적인 약속이다. 아무렇지 않을 수밖에. 아무렴, 아무렇지 않아야지.
손끝에 따스한 기운이 닿는다. 돌아보니 불안이 바닥서부터 고이기 시작했다. 독백을 향해 돌아서서 차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돌연 불안의 수면 위로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고개를 드니 뭔지 모를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불안과는 다르게 어찌나 되직한지 불안에 희석되지 않고 구슬 모양으로 응결해 바닥에 가라앉는다. 느린 박자로 똑. 똑. 물방울은 맞물리면 하나가 됐고, 다시 하나가 되어서, 커다래지더니 불안 아래 고인 연못 같은 것이 된다.
벽 너머로 연못 쪽에 손을 대어본다. 차갑다. 손을 조금 올려 불안 쪽에 대어본다. 여긴 더 뜨거워졌다. 가만 보니 희미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달뜬 마음 아래서도 녹아들지 못하고 차갑기만 한 이 물방울의 이름은 뭘까. 내가 널 뭐라고 불러줘야 할까. 이마로 서서히 따듯해지는 기류를 느끼며 생각했다.
불안과 섞일 수 없는 것. 아님 물방울이 부러 불안과 거리를 두는 건지, 불안에 닿고 싶지만 불가능한 건지, 아직은 희석될 때가 아닌 건지 여러 가능성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아, 해파리는 가라앉는 중이다. 바닷물에 파고든 햇빛을 지나, 아름다운 산호초를 지나, 산호초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 그림자 아래 숨어있는 암벽을 눈에 담으며 윤곽선을 잃어갔다.
마치 닻이다. 떠오르는 건 불가능해서 햇빛 어딘가에 머물어볼 겨를 없이 가라앉는다. 해파리는 지금 느끼는 우울이 이상하다. 아까 그곳. 사실 해파리는 낙원 같은 풍경에 잘 스며들기를 바랐다. 누가 봐도 평화롭고 행복한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들어서려니 자신이 꼭 불순물처럼 느껴졌다. 해파리는 왜 그런 낯선 느낌이 들었는지 헷갈리지만, 나는 어렴풋이 이유를 이해한다. 아마 홀로 남아 마음에 고인 연못만 들여다본 탓이다. 그림자 진 웅덩이에 시커멓게 비친 모습으로만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바라온 꿈인데도 불구하고 결국엔 다가가지 않은 모순이 해파리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애초에 내가 자처한 일이잖아.] 그런데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건지 모르겠다. 내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것도 슬픈 모순 같고. 해파리를 둘러싼 어둠이 깊이를 더할수록 숨어 있던 슬픔이 기어 나온다. 해파리는 지금 마음을 정확히 호명할 만한 말을 떠올릴 여력조차 없어서 그저 슬픔, 슬픔이라고 뭉뚱그려진 생각만 반복했다.
한 번 빠지면 바닥에 닿을 때까지 가라앉아야 하는 닻처럼 시간을 흘려보낸다. 닻. 닻. 해파리는 무엇을 정박하고 싶은 걸까. 무엇에 정박하고 싶은 걸까. 정박이란 걸 해야 하는 걸까. 무어라 일컫기 어려운 정박의 소망이 독백 겉면에 이슬처럼 맺히더니 불안의 열기를 받아 안개로 승화한다. 와중에 불안을 밀어내려는 본능이 안개 사이에 빈자리를 만든다. 우물을 닮은 그곳엔 홀로 남은 낙원이 고였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한다.
홀로 남은 낙원은 낙원일까. 안개를 윤곽선 삼은 자리는 손쉽게 흐려져서, 손바닥으로 수증기를 조심히 그러모아 뭉툭한 벽을 만들어줬다. 이건 지켜야 할 몽상 같아서 희미해지지 않도록 꾸준히 손을 움직였다. 좀처럼 선명해지지도 않고, 흩어져 사라지지도 않는 꿈. 자리를 지켜보면서 불안만큼 느려진 시간이 무사히 흘러가길 기다렸다.
그동안 외로움을 먹고 자라는 낙원에 대해 생각했다. 홀로 남았으니까 곳곳에 남은 외로움이 낙원의 생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그래야 그곳에 머무는 이가 충분히 숨 쉴 수 있을 테니까. 그 외로움은 어떻게 생겼을까. 따스한 햇빛일까. 흙 속에 스며 흐르는 물방울일까.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일까. 해파리는 푸른 몸이니까 낙원에는 푸른 이끼가 자랄까. 해파리 몸속을 떠다니는 연푸른 발광물질 들을 잠시 눈여겨본다. 해파리가 홀로 남은 낙원인 걸까.
여기가 낙원인 걸까
어렴풋한 기분을 단서 삼아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을 찾아본다. 그러는 동안 안개는 몸집을 키워 내면 구석구석에 습기를 밀어 넣는다. 몽상이 자리하던 둥근 자리는 안개에 묻혀 사라지고 - 안개에 뒤섞여 사방에 흩어진 것일지도 몰라 - 정말 이끼라도 자라게 하려는 건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달뜬 마음이 차분히 식어간다. 내면의 온도가 균일해지면 안개도 서서히 사그라든다. 그새 불안도 기화해서 안개가 되었던 건지 독백 안에는 불안 아래 고여있던 연못이 동그란 구슬처럼 남았다. 얼마 후 담담한 체온을 되찾으면 해파리는 저도 모르게 도착한 그림자 속이 춥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몸을 웅크렸다가 펼쳐내며 위로 헤엄친다. 빛이 가까워진다. 등 뒤로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멀어진다. 작은 물방울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누군가 살아서 피워낸 흔적들이겠지. 저만치 위에 아까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면 헤엄을 멈춘다. 홀로 남은 애매한 깊이. 그래도 충분한 빛으로 환한 적막 아래서 해파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모든 이들이 헤엄치는 저곳과 외로움을 양분 삼은 이곳이 공존하는 풍경. 해파리는 문득 그것이 너무도 흔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다채로운 빛깔과 물살로 활기찬 저곳을 응시한다. 아름다운 곳이다. 아름다운 곳. 거기까지. 소망이었던 저곳에 대한 상념이 더 나아가지 못하자 해파리는 차분히 돌아섰다. 열브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운 바다를 향해 조금 아래로 헤엄친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더 빛날 낙원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