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만큼 실력 있었지만, 평생 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고 생각한 조각가가 있다. 로댕의 제자이자, 예술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다.
클로델은 이미 성공한 조각가였던 로댕을 조수로서 처음 만나고, 곧 그의 예술적 협력자이자 동시에 연인이 된다. 하지만 로댕은 이미 만나고 있던 연인이 있었고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클로델과 로댕의 관계가 끝난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클로델은 로댕에게 또 다른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로댕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그의 명성에 자신의 예술성이 가려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예술적 독립을 갈망하게 된다. 이런 복합적 이유가 그녀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했고, 결국 정서적 문제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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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의 정서적 불안함이 무색하게 그녀의 작품은 스승만큼이나 유려하다. 그녀의 대표작인 ‘생명의 물결’은 왈츠를 추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두 인물은 서로에게 매우 몰입하고 있으며, 동시에 물결처럼 운동성이 있는 관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도처럼 너울 치는 여성의 드레스를 통해 카미유 클로델 특유의 섬세한 조각술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두 인물에 내재한 강한 동적 에너지를 암시한다.
로댕과 밀접한 예술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로댕과 클로델의 작품은 비슷하지만, 동시에 또 다르다.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 그리고 극적인 순간의 포착을 지향한 로댕에 비해 클로델은 선의 흐름과 균형을 통한 섬세함 그리고 부드러움을 추구했다. 합의점을 찾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달랐던 둘의 예술적 성향은 둘의 관계 자체를 투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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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생명의 물결’은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외 그녀의 많은 대표작이 본 박물관에 있다. 평생 로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사후에도 클로델의 작품은 로댕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클로델이 그랬듯,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방을 꿈꾼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술이 언뜻 보기엔 자유로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예술은 멀리서 볼 때 해방이고, 가까이서 볼 땐 통제이다. 자유로움을 위해선 강한 통제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제가 일정 수준에 도달해 마침내 체화될 때, 그때 예술가는 자유로움을 실현한다.
예시를 위해 연기를 하는 필자의 경험을 빌려보자면, 배우들도 그렇다. 무대에서 그리고 스크린에서 배우들은 유감없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훈련을 거친 강한 신체 통제가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통제가 해방의 수단이라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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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카미유 클로델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역설은 로댕과의 관계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와의 관계 속에서는 예술적 독립을 추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로댕과의 관계를 통제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고립을 추구해야 했다. 해방을 위해서 그녀는 사랑과 영감의 원천인 사람이 동시에 족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 것이다.
그 간극과 고군분투하는 동안, 해방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클로델도 해방은 환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을 향한 갈망과 정서적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던 클로델은 노년에, 정신병동에 강제로 수감되어 삶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그녀가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설령 그녀가 스스로 해방은 없었다고 느낄지라도 현대에서 우리가 로댕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클로델을 조명하는 방식이 그녀의 해방을 완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갈망하는 해방이 있다. 해방이라는 것은 어느 날은 환상 같다가도 어느 날은 실현 가능해 보인다. 배우들은 그 해방을 위해 강한 신체 통제를 사용하는 것처럼, 본인의 해방은 어떤 역설을 받아들일 때 실현 가능한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 역설을 인지할 때, 해방은 환상이 아닌 실재임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