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고 불분명해진다. 늦기 전에 다시 입력하지 않으면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홀랑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그것이 한때 소중하게 여겨지던 하루여도, 사랑받고 사랑했던 아버지의 얼굴이어도 시간이 가져가는 선명함은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방법을 쓴다. 글과 그림으로 기록을 남긴다. 오감으로 기억하는 것을 또렷하게 남기려고 노력한다.
마크 로스코는 모두에게 먼 기억 속에 교과서에서 본 이름이다. 미국의 화가. 추상표현주의 예술의 대표적인 화가로 기억한다. 재밌게도 화가는 얼굴보다 그림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당장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얼굴보다 그림이 먼저 가득 화면을 채운다. 필자 또한 마크 로스코의 얼굴을 이번 책을 읽으며 처음 보았다. 그림을 통해 상상했던 모습보다 학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번에 책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를 읽었다. 미술 교과서에서 봤던 단순한 색칠된 사각형으로만 기억하는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들었다. 게다가 이 책의 작가는 마크 로스코의 관계자라고 표현하기에는 더 친밀한, 그의 그림과 평생을 함께한 아들 크리스토퍼 로스코의 책이다. 이토록 가까운 관계자가 바라본 사람, 마크 로스코를 기대하며 책을 펴고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다.
책은 1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번역서는 512쪽 984g이다. 육중한 크기에 표지를 벗긴 본체가 검은색이라 책을 읽기 전부터 비주얼에 압도될 수 있다. 솔직히 필자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과연 이 책을 모두 읽을 수 있을까? 하지만 작가 크리스토퍼는 글을 재밌게 쓰는 사람이다. 물론 작가이자 심리학자이기에 어려운 전문 용어들이 나올 때면 잠시 혼란스럽지만, 보통의 편안한 문체가 그 시간을 이긴다.
잠시 솔직한 책 선택 이유를 밝히고 싶다. 사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관심이 있던 것도 맞지만 그의 아들이 낸 책이라는 이유가 더 크다. 마크 로스코는 스스로 먼저 세상을 떠난 화가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다. 더 나아가지 않은 그의 인생에 대한 오지랖 넓은 아쉬움이 남고, 그를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가족들에게 감히 감정 이입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 상황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조차 들을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 이 책은 아버지와 6살에 이별한 작가가 생전 함께한 경험, 대화와 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책을 선택한 이유이기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집중해서 읽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고 필자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수 있겠다고 걱정했다.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는 평생 마크 로스코의 아들로 살아왔지만, 그 위대한 화가를 이해하기 위해 수십 년의 탐구를 이어온 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사회과학(심리학)을 공부했다. 책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분명하고 논리적인 형식으로 진행된다. 기대했던 부자 관계의 정서적, 전기적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었다.
'로스코의 그림을 이해하는 여정은 결국 로스코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작품에 로스코라는 한 인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인간 로스코에 관한 역사적·기술적·전기적 지식은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중하여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19쪽)
크리스토퍼는 글 시작부터 우리에게 가족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도록 한다. 예술가 아버지를 둔 아들의 삶이 그의 작품을 해석할 때 미치는 영향이 궁금했는데, 마크 로스코의 공적 이미지와 개인적 삶의 어려움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알고 싶었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답변의 창이 닫힌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읽는 자에게는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그가 마지막 두 장에는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가는 아버지 마크 로스코가 어머니, 누나, 자신을 만난 순간들이 그가 예술적으로 성장 시기와 겹쳐지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의 믿음직한 기반이 되어준 어머니의 안정감 덕분인지 아버지의 예술적 자신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고(449쪽), 회화 양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454쪽). 누나가 태어나면서 처음 아버지가 된 마크 로스코는 그해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그렸다. 자신이 태어난 해에는 아버지가 화가로서의 정점에 이른 해라고 말한다(456쪽).
재미있는 부분은 그것을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는 틈을 열어두며 글을 썼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가족의 사랑이 아버지의 예술적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문체로부터 크리스토퍼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느꼈다. 부모님의 연애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그린 그림에 대해 소개한 면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주었다. <바닷가의 느린 소용돌이>라는 작품의 부제는 '황홀한 멜(어머니의 애칭)'로 앞선 그림들의 세 배 이상 큰 전례 없는 규모라고 한다(451쪽).
아버지의 작품들을 학자처럼 탐구의 자세로 글을 쓰는 그에게 오직 나의 기대 때문에 이유 없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실 책을 읽는 내내 크리스토퍼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매개로 끊임없이 여전히 소통하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계속 이어져 소통하게 한 다리로서의 가장 큰 역할은 분명 마크 로스코가 남긴 책 <예술가의 리얼리티>이다. 5장의 내용이 그런 면에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문체는 학문적이지만 내용을 유심히 보면 글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와 대화하는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장에서는 아버지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드러난다. 그는 어린 시절은 부모가 자기 우주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기로 부모를 집중적으로 알게 된다는 지식을 전달하며 그가 여섯 살 때까지만 아버지 마크 로스코를 알았지만, 그 시기에 그를 이미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였음을 함의한다(459쪽). 또한 그와 예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461쪽).
'핵심 성격Core personality은 아주 이른 시기에 발달하는데, 아버지가 내 본성을 싹트고 이해력이 형성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그의 부재가 이를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 아버지의 깊고 둥그스름한 목소리는 내가 본 수많은 사진에 의해 오염된 시각적 기억보다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다. 그 목소리는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또 다른 선물이었다. 그 소리는 때로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460-461쪽)
책을 덮으며 필자는 이 책이 마크 로스코의 책 <예술가의 리얼리티>의 서문이자 예고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책이 있었기에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책의 구상이 10년 전이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책 원고를 처음 본 게 15년 전이니 말이다. <예술가의 리얼리티>는 학자들에게 엄청난 선물이었는데, 아들에게도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더욱 알게 도와줬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왜인지 '마크 로스코의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을 상상했다. 필자는 아버지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입장에서 책을 보며 아들이 얼마나 뿌듯하고 고맙고 기쁜 마음을 느꼈을지 생각해보았다. 가족을 뒤로한 채 떠난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아들은 마크 로스코가 없는 시대에 그의 생각을 대신해 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쁘게 사용했다. 그것만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게 의미 있다. 아들의 분석을 읽었으니 이제 아버지의 기록을 살펴볼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