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들의 모습이 결국 우리였기에 -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글 입력 2024.09.09 12:4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인기가 많아 표 예매부터 힘들다는 대학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고 왔습니다. 이미 낡아버려 인간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헬퍼봇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이 뮤지컬을, 사실 저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배경 지식을 가지고 무작정 관람하러 찾아갔습니다.


로봇의 사랑에 대한 공연이라. 어쩐지 그 내용이 짐작 갈 법도 했습니다.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고? 그런데 이야기가 슬프다고? 아, 로봇이기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떠한 관람 포인트가 있나 보구나. 스스로 어림짐작 한 채로 공연장에 찾아가 막이 오르길 기다렸습니다.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주인공 올리버와 클레어가 배워가는 사랑과 슬픔의 감정에 함께 몰입하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왜 인기 있는 공연인지, 왜 마니아층이 두터운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게 짜인 각본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워낙 유명한 공연이고, <어쩌면 해피엔딩>을 칭찬하는 글들도 많으니 저는 오늘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공연이 끝난 후 제게 떠오른 한 가지 의문에 대해서요.


우선 간단하게 극 중 내용을 설명하자면, 사랑에 빠진 올리버와 클레어는 점점 더 가까워지며 추억을 쌓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그들의 부품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고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클레어는 결국 그동안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합니다.


끝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결정되어 있는 나날들 속에서, 올리버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에 동의한 올리버와 (결국 그는 기억을 지우지 않았지만) 클레어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그들이 쌓아온 모든 기억을 스스로 삭제합니다.



[크기변환]스틸컷1.jpg

 

 

저는 이 부분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왜, 어째서 클레어는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 걸까? 그냥 끝이 보이더라도 끝까지 올리버와 함께 하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도 될 텐데. 기억을 지우면, 올리버와의 추억뿐 아니라 그 시간 동안의 클레어 자신의 모습도 모두 잃게 되는 것인데. 그게 정말 괜찮은 걸까?


사랑하는 순간에는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행위를 통해 감정적으로 풍부해지거나, 점점 더 성장하게 되는 일 또한 사랑의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이 정해져 있는 이별이 두렵기 때문에 그 모든 시간의 자신을 놓아버리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지우는 극 속 장면을 보며, 슬픈 감정이 올라옴과 동시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여기까지는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저만의 견해였고, 이제는 이 글을 통해 클레어의 선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려 합니다.



[크기변환]스틸컷대표사진.jpeg

 

 

우리는, 인간은 모두 이별을 두려워합니다.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세상에 이별 노래가 가득한 이유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다 헤어지고 난 후에 겪는 감정적 고통은 누가 쉬이 공감해 주기 힘들 만큼 무겁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다시 누군가와 시작하고, 다시 사랑을 주기 시작합니다. 비관적으로 보면 언제나 그랬듯 끝은 정해져 있는데 말입니다.


만약 인간에게도, 올리버와 클레어 같은 로봇처럼 기억을 삭제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이별 후에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감행했을 겁니다. 연인과 헤어진 후 크게 방황하는 주변인들을 보면 차라리 기억을 지우도록 해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미래의 이별을 확신할 수 없는 인간에게도 언젠가 있을지 모를 그날이 두려운데,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 수밖에 없는 로봇들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들이 얼마나 칼날 같이 다가왔을지 짐작해 본다면 클레어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크기변환]스틸컷2.jpeg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했습니다. 끝을 알고 있었지만 사랑을 했습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낡은 헬퍼봇이 사랑을 시작하는 행위가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인 우리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무모하게 시작하고 서툴게 끝을 내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나 봅니다. 그들과 우리가 같아서.

 

 

 

컬쳐리스트명함.jpg

 

 

[김민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10.1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