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피드백 모임] 더는 쓰고 싶은 글이 없다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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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쓰고 싶은 글이 없다는 슬픔
솔직히 털어놓자면 글쓰기에 관한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자로서도, 필자로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땔감처럼 갈아 넣는 사람을, 반대로 망망대해 속에서 자신을 붙들어 주는 유일한 구명정이 글인 사람을,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릴 때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 중 누군가는 여전히 글을 위해 삶을 불태우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글 없이도 부유하고 있음을 안다. 그때가 틀려고 지금이 맞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글이 있어도, 없이도 삶은 계속된다는 뜻이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나도 ‘글 쓰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글쓰기에 그렇게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이는 글쓰기가 현실에 정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삼고, 글로 돈을 버는 몇 년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이제 글쓰기는 내게 낭만적인 허깨비가 아닌, 현실적인 기호가 되었다. 저자가 보낸 글을 다듬어 세상에 내놓고, 원고에 대한 독자의 피드백을 받으며 다음 원고 발주를 준비하고, 원고료를 위한 기안을 올리고…. 그리고 나 역시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쓰고, 그 돈에 걸맞은 원고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글로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서 보람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써서 컴퓨터에 잠재워 놓지만, 이제는 ‘글’과 나를 심각하게 연결 짓는 것이 어쩐지 불편하고 낯간지럽다. 나에게 글은 자기표현과 성취를 위한 소중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 노동의 장에 있는, 월화수목금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글에 관한 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글쓰기를 향한 고백이 문장과 표현 단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쓴 글을 걸쳐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비단 글뿐만이 아니겠지만, 잘 쓰는 사람보다 오래 쓰는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돈과 피드백과 기안과 입금과 계약의 세계에서 어쨌거나 계속해서 쓰는 것.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삶. 내가 존경하고 원하는 ‘글 쓰는 삶’은 그런 것이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라는, 신형철 평론가가 <느낌의 공동체> 책머리에 쓴 문장이 감동을 준 까닭은 문학을 향한 그만의 ‘정확한 사랑’이 담긴 개개의 글을 내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글, 글을 쓰는 나를 향하는 사랑보다는 어떤 대상을 향하는 사랑이 꾸준한 글이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고백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쓰고 싶은 글이 없어 슬프다는 자기 고백적인 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이러한 부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열변을 토했지만, 쓰고 싶은 글이 없을 때는 쓰고 싶은 글이 없다는 글을 쓸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도무지 쓸 말이 없다. 이미 글은, 글쓰기는 일상의 어떤 것이 되었는데 나에게는 쓸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는 쓰고 싶은 글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더는 쓰고 싶은 욕망도 없다는 것.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내 진심만을 확인하고자 겨우 쓸 수 있는 글이 이런 글뿐이라는 것. 사랑 없는 고백이 공허하듯, 이 글 역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지난 4개월간 오로지 ‘서로의 글을 피드백하겠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새삼 느낀 것도 이러한 내 안의 공허함이었다. 사랑하는 대상-그것은 영화이기도, 공연이기도, 웹툰이기도, 음악이기도 했다-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게 더 좋은 고백을 하기 위해 자신의 글에 대한 피드백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얼마나 반짝였던가. 그리고 그에 비해 내 글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얼마나 무감했던가. 이러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을 알려 준 그들의 반짝임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나의 글을 발전시키겠다는 열정,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글로써 잘 소화해 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용감함. 내가 소진하고 없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마주한 시간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글을 쓴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가는 입장에서 이것은 일종의 슬럼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것이 슬럼프가 아닐지라도, 정말 한동안 사랑하는 것 없이 살더라도 내 삶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 역시 안다. 다만, 언젠가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이 나타날 때, 그래서 그것에 대해 운을 떼지 않고는 못 배길 때, 또다시 그 사랑을 글이라는 꾸준한 고백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을 뿐이다. 더는 쓰고 싶은 글이 없는 것은 슬프지만, 다시 그것이 사랑으로 채워질 순간을 알기에. 다시금 나도 그들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 글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다시 신형철식으로 말해 보자면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이것이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김나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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