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기의 효능과 만화 '위국일기'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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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봐야지, 하면서 어쩐지 계속 미뤄두게 되는 만화 리스트가 있다. <위국일기>도 그중 하나로, 국내에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호평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쩐지 계속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위국일기>가 국내에 곧 개봉하고, 만화는 올해 5월에 11권으로 국내 완결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완결까지 애태우며 기다릴 필요가 없을 테니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어서 읽자는 마음으로 만화 <위국일기>를 읽었다.
일기의 효능이란
일기는 아주 사적인 기록이다. 우리에겐 학창 시절 일기를 검사 맡던 기억 때문에 일기가 사적이거나 솔직하기보다는 일종의 검열을 의식하는 기록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말이다. 일기를 쓰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너무 울적한 내용만 쓰면 그게 저주처럼 따라붙을 것 같은 느낌에 괜히 밝은 내용만 남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거짓말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일기야말로 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공개될 것이란걸 염두에 두지 않고 솔직하게 썼던 유명인의 일기가 사후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사거나 일종의 충격을 주는 일도 있다. 사랑 앞에서 솔직했던 보부아르나 글이 써지지 않아 두 쪽을 겨우 썼다고 적은 카프카의 일기가 떠오른다. (작성자의 동의 없는 공개가 옳은 일이었는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누군가가 읽거나 무슨 망신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일기를 왜 솔직하게 써야 할까?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등대로서의 일기
"그날, 이 사람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늑대 같은 눈을 하고 천애고아가 될 나의 운명을 물리쳐줬다."
"난 대체로 기분이 안 좋고 널 사랑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 하지만 난 절대 너를 짓밟지 않을 거야."
제목부터 '일기'가 들어가는 만화 <위국일기>의 주인공은 부모님이 차 사고로 사망한 15세 소녀 아사다. 아사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한, 35살의 소설가인 이모 마키오와 함께 살게 된다.
아사의 어머니인 미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절연한 상태로 지냈던 마키오는 반쯤 충동적인 마음으로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사를 데려온다. 언니의 죽음이 그다지 슬프게 다가오지 않고, 사람과 함께 지내기를 불편하게 여기며, 이후 아사와 함께 지내면서는 자신이 싫어하던 언니의 자식이라는 점이 때때로 신경 쓰이는 마키오로서는 대담한 결정이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하는 아사에게 마키오는 일기를 써보라는 조언을 건넨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누가 네게 무슨 말을 하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 네가 지금 뭘 느끼고 뭘 느끼지 않는지. 설령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슬퍼졌을 때 그게 네 등대가 될 거야."
아사는 마키오의 조언을 등대 삼아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썼다 지우거나 헤매면서도 꾸준히 기록해 나간다.
죽은 어머니의 일기
<위국일기>에는 아사의 일기 말고 다른 이의 일기도 주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바로 아사의 어머니인 미노리의 일기다.
아사의 어머니이자 마키오의 언니 미노리는 스무 살이 되면 딸에게 주려고 일기이자 편지를 적어두었다. 사고로 사망한 이후 집을 정리하던 마키오가 미노리의 일기를 발견하고 어느 타이밍에 이걸 아사에게 전할지 고민한다. 이후 일련의 소동이 벌어지고 마침내 어머니가 생전에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일기를 읽은 아사는 혼란스럽다. 자기 이름인 '아사(아침)'의 의미와 더불어 사랑한다는 고백이 적힌 일기는 어쩐지 솔직하지 못한 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사의 어머니 미노리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던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바랐었다. 하지만 혼인신고를 원하지 않는 남편의 바람 때문에 사실혼 관계에서 아사를 낳으며 생각대로 되지 않은 삶에 고독과 괴로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건 창피한 거야!'라고 동생 마키오에게 소리 지르던 어린 미노리의 잣대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자신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노리.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미노리의 고독과 고통을 마주한 아사는 혼란스럽다.
그리고 미노리의 일기는 특정한 타인을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였다는 점, 자기 자신을 얼마간 속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사의 일기와 차이점을 가진다.
솔직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주인공, 솔직함이 미덕인 일기
중학교 졸업식 날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나'로 참여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아이'로 보이는 게 싫었던 아사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린다.
그리고 이후에 고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조금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고교 입학식 날, 주목받고 싶고 비범하게 보이고 싶었던 아사는 처음 만난 친구들과 가족 이야기를 하던 중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소설가인 이모와 살고 있다고 밝힌다. 벌써 자립한 거구나, 어른스럽다, 같은 반응이 나오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상황에 아사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반응에 당황한다. 그리고 이내 창피해진다. 타인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에 하는 아사의 말들에 내 얼굴이 화끈거리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아사의 솔직함에 공감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밴드부에 들어간 아사는 친구들과 작사를 하기로 한다. 엄청난 재능으로 단박에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아사는 첫 작품을 이모 마키오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마키오는 시 쓰는 거 처음이냐고 물으며 식은땀을 흘린다. 애써서 좋은 말을 고르고 골라 전하는 마키오의 모습에 아사는 실망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죽을 각오로, 죽일 각오로 쓰라는 마키오의 조언은 아사에게 수수께끼 같다.
그리고 이 상황 이후에 이어지는 아사의 대사와 내레이션은 그야말로 일기의 정수이자 솔직함의 정수다.
"이모는 소설가고,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완전 힘들어서 음악적 깊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은데 왜 시원찮은 거야?! 그게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인생에서 역경과 고난, 상실을 겪었을 때 그게 바로 나에게 깊이를 더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갈래가 아니다. 괴롭고 슬픈 것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아사라는 인물이 이야기 속에서 가진 장점이자 단점, 솔직함이, 이 마음을 크게 외치게 한다. 바로 이 점이 아사를 매력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인물로 만든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판단하지 않고 외치거나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 '깊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인생의 역경과 고난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사람에게는 그걸 자신의 언어로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아사가 이모 마키오를 비롯한 서로 다른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 그 소화의 과정과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본다.
내향적이고 섬세한 이모 마키오와 거침없고 솔직한 조카 아사의 동거는 서로 다르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배우며 곁을 내어주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고 말하는 마키오의 모습에 어른도 상처를 받는지 몰랐다며 놀라는 아사의 모습이나, 마키오를 아직 사랑하는 헤어진 전 애인이 집에 놀러 오자 애인이냐고 물으며 아픈 데를 건드리는 아사의 모습은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아사의 이런 무신경한 지점은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남자 친구 안 만드냐며 물어대는 아사의 무신경한 태도에 커밍아웃을 미루던 친구 에미리는 어느 날 아사에게 여자 친구가 있음을 밝히며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다. 이 과정에서 아사는 말실수 하고 사과를 하며 관계에 대해 새로이 배운다.
한 편으로는 에미리 역시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신 아사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부담스럽다'는 한편의 솔직한 마음이 지나간 이후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거기에 그 사람을 위해 있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듯 사람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고 온전한 이해라는 건 기만에 가까울지라도 새롭게 서로에 대해 배우며 함께하는 관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내레이션은 일종의 일기처럼 작용하며 각 인물의 솔직함을 비춘다. 인물들은 무작정 긍정적이거나 무작정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날 것의 솔직한 감정을 한 번 직시한다. 무조건적인 헌신이 아니더라도, 자기 생각과 감정을 먼저 두면서 오히려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위국일기>에서 타인과 소위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아사처럼 일기의 형태를 띠거나 내레이션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인물들의 솔직한 마음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작중에서 쓰는 건 고독한 일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게다가 보통의 일기는 독자가 있을 수도 없을지도 모르는 글을 쓰는 일이다. 미래의 내가 과거에 쓴 일기의 독자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과 마주하는 것이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다. 다시 들춰보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 쓰기는 타인과 관계 맺기 이전에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기를 써야 한다. '내가 누구고, 뭘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알게 되는'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설령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게 되는 날은 영영 안 오고 계속해서 헤매거나 제자리걸음을 걸을지라도 일기가 우리의 등대가 되어줄 테니까.
[안소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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