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호하면서 명확한 추상화의 세계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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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무엇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정형'과 속성, 본질을 표현한 '비정형'이 있다. 미술에서는 이를 '구상과 추상'이라고 구분한다. '구상'은 인물, 정물, 풍경 등 대상의 외향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추상'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비물질, 정신적 형태이다.
구체적 형태를 가지지 않은 추상화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만의 모호한 표현방식을 이해하고 관람객 스스로 해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추상화 감상의 묘미라고 볼 수도 있다.
작품에는 창작가의 세계가 담겨있다. 따라서 작가가 살아온 생애와 작업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가 표현한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경남 도립미술관 ‘추상과 관객’는 관객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맞춰있었다.
경남도립미술관 기획전 <추상과 관객>
창원에 위치한 경남도립미술관에서는 6월 21일부터 10월 6일까지 경남 추상회화의 거장인 전혁림, 이성자, 이준의 작품과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전현선, 오유경, 조재영의 작품을 매개로 관객이 적극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추상과 관객》전을 운영하고 있다.
관객이 작품을 그저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그림 앞에 멈춰 작가의 생각과 작품에 대해 탐구해 볼 수 있도록 전시를 설계했다. 일생, 서사, 사건 등 모호한 언어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술관이 추상의 개념과 작품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 전시기획 방법과 인상깊었던 작가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림 시작지점에는 작가의 출생고향과 학교, 생애별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작품을 그렸는지, 구술녹취문, 작가의 저서, 인터뷰 등 자료를 활용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추상화된 자연과 전통을 표현한 전혁림 작가
작가는 남해, 통영 앞바다의 향토적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과 민화, 자수, 조각보 등 차용하여 한국적 미의식을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통영에서 나고 자란 영향일까. 통영 바다를 닮은 푸른색채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자수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조선자수에서/1999년> 작품은 푸른색감을 배경으로 강렬한 원색의 전통무늬가 인상적이었다.
추상적인, 조금 더 차원이 높은
그런 풍경화를 그리고 그런 작품을 그릴 거야.
평범한 그림이 아니라 좀 특이하고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작품.
음성언어, 문자언어는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만 아는 말을 하면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미술의 세계는 나만 알 수 있는, 나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허용된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수단이 된다.
추상성은 이러한 점에서 재밌는 장치가 된다. 바다, 배, 산, 아침풍경, 누구나 그리는 형태가 아닌 자기가 받은 느낌, 감정을 자기만의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혁림 작가는 구상과 추상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전통과 현대를 구현한 작가로 기록된다. 그의 조형언어는 향토적이면서 푸른빛이 돌았다.
대립적 요소의 조화로움을 표현하는 이성자 작가
나는 음과 양이라든지, 동양과 서양, 죽음과 생명같이 두 개의 상반된 것을 한 화면 위에 창조해 내기를 원한다.
배반인문학 시리즈 ‘말:감각의 형태’에서는 인간의 감정이 말로 터져 나옴으로써 음성언어가 생성되고 이것이 문자기호로 발전되어 문법과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말를 가진다는 것은 한 세계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즉 정형의 형태를 가진 말과 문자를 습득함으로써 사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과 글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느낌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미술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언어를 벗어나, 자기만의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다.
추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다수가 이해하는 공통의 언어가 아닌 비정형의 형태라서 모호한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추상적 표현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내 아들들과 살 수 없는 형편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그 괴로움을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1951년 나는 결심을 했다. 불란서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힘을 얻어오겠다고 했다.
이성자 파리에 꽃 핀 동양의 시 292쪽
이성자 작가 작품에는 점과 선,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자연과 도시 등 대립적 조형들이 조화를 이루는 중복 작업이 등장한다.
작가의 작품은 가족과의 분리, 단절된 삶의 고통을 외로움, 괴로움을 극복하고 자는 염원이 담겨서일까. 지중해, 대척지로 가는 길, 수성에 있는 나의 오두막, 작품에는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는 조각과 다양한 조각으로 결합된 원이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담겨있었다.
여성 특유의 경험과 감수성을 따뜻하면서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한 이성자 작가의 작품들이 마음에 남았다.
추상이란 무엇인가
언어는 공통의 약속이다. 한 사물, 현상을 지칭하는 언어기호를 사회적으로 약속함으로써 구성원들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림은 다르다. 약속된 언어기호가 없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다. 작가가 전하고자는 것, 드러내고자 하는 것,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본인만의 기호로 창작해 낸다.
정형화된 언어를 쓰는 사회 안에서 비정형, 추상적인 형태로 자신만의 감정, 느낌을 표현해 본 경험이 있는가. 누구나 볼 수 있는 사물, 풍경,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소통을 돕는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애를 기반으로 창작된 추상화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경남도립미술관에서 10월 6일까지 개최되는 '추상과 관객' 전시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김세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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