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다. 수업 시간에 인간은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부터 ‘주체적’이라는 말에 꽂혀버렸다.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마 ‘그러지 않을까?’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입시 체제의 틀 안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학과에 들어왔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중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뮤지컬 분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한정석 작가이다. 그만큼 나는 한정석 작가의 작품을 여러 번 보았다. (연뮤계에서는 흔히 ‘회전’이라고 불린다) 정말 흥미롭게도 한정석 작가께서 집필하신 모든 작품은 ‘주체성’이라는 키워드가 중심이 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최근에 한정석 작가의 작품 대본집을 살펴보던 중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 작품들을 통해 나의 주체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꽤나 도발적이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소위 연뮤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제목이 진입장벽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작품 중 하나이다.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마냥 귀엽고 가벼운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쉬우나 사실 이 작품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남과 북 군인들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나누며 화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레드북」의 주인공인 안나는 ‘야한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작품의 배경은 신사의 나라 영국, 그것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잘 알려졌던 빅토리아 시대이다.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만 읽었을 땐 꽤나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한 주인공 설정에만 눈길이 가기 쉽다. 그러나 「레드북」의 대표 넘버가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인 것처럼 이 작품은 나를 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말하고 있다.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껏 뮤지컬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독재자의 대역 배우’라는 핵심 설정은 관객들의 흥미를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만큼 이 작품은 공연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 공연 기간 중후반부에 달했을 시기에는 전회차 매진이라는 좋은 성과를 이뤄냈다. 이 작품이 성공한 것은 드라마가 가진 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독재자의 대역배우로서 살아간 삶의 일부분이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주인공 ‘네불라’의 주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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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님이 보고 계셔


 

 

"수줍은 인사에 싹을 틔워 마주한 눈빛에 잎이 나서 어느새 훌쩍 자라난 꽃봉오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한국전쟁 당시,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 남한과 북한 군인들이 여신을 믿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전쟁 중 형을 잃은 기억으로 PSTD를 앓고 있던 순호는 유일한 선박 수리공이다. 두려움에 떨던 순호를 설득하여 배를 고치기 위해 주인공인 영범은 그에게 무인도에 살고 있는 가상의 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지어낸다. 순호는 여신님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점차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호가 배를 고치게 하기 위해선 모두가 여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남·북 군인들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다소 유치한 상황극이라 무시하던 군인들은 ‘여신님’의 존재에서 저마다의 그리운 이를 떠올리게 된다. 극 중에서 여신님은 누군가의 연인, 누이, 어머니, 아버지 등으로 변모한다. 그렇게 남북한 군인들은 서로 ‘그리움’이라는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며 더 이상 대립이 아닌, 연대를 지향하게 된다. 순호는 맨 마지막에 가장 진실된 자신만의 여신님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순호는 처음부터 여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후반부 가장 큰 위기가 도래한 순간, 자신은 처음부터 여신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고 밝힌다. 순호가 여신님에게 빌고 싶었던 소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모두가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 그러나 다시 번진 갈등으로 인해 여신님의 존재는 깨져버렸고 무인도에 절규가 퍼졌을 때 순호는 스스로 여신님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때 순호가 여신과 나누는 대화는 사실 자신의 내면, 즉 두려움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결국 홀로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동료들을 구해낸다. 극안에서 가장 비약적인 성장을 일궈낸 순호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여신님의 존재가 외부인이 아닌, 자신의 내면 속 자아의 형태로서 존재한다. 외부 요인으로 인해 고통받던 인물이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며 주체성을 되찾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를 건네준다. 나라는 사람의 주체성을 잃기 쉬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호의 모습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많은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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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북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

 

 

「레드북」은 가장 보수적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야한 소설을 쓰는 안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안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그녀는 타자기도 칠 줄 알고, 이전에 하녀로 일해본 경력도 있으나 여자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그렇게 가게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안나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것이 취미였던 안나는 상상 속 존재인 ‘올빼미’를 부르며 힘든 상황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간다. 그러던 도중 안나는 우연히 변호사인 브라운의 비서로 취직하게 된다. 브라운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부탁대로 안나를 찾아가 그녀를 비서로 고용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자신의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야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분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의 소설은 ‘숨어서 몰래 읽는 맛이 있는’ 베스트셀러 소설이 된다. 서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안나는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유명한 평론가가 아닌 바로 브라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브라운 또한 안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통해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질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가슴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바로 안나가 본인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때 안나는 마냥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는 점에서 새롭다. 그녀는 자신을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기 위해 사용한 ‘야한 여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때 ‘여한 여자‘는 주변인들이 낙인찍은 정체성이 아닌, 안나가 스스로 정의 내린 수식어라는 점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나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안나를 이해할 수조차 없었던 브라운도 점차 성장해 나가는 점이 잘 보여서 좋았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인정’은 안나 개인에서 레드북을 읽은 모든 독자에게로 퍼져나간다. ‘레드북을 읽고 난 후’ 넘버에서는 레드북을 읽은 독자들이 더 이상 레드북을 읽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법정으로 나와 안나를 위한 진술을 해준다. 여기에서는 레드북을 읽은 독자들이 이 책을 계기로 얼마나 변화하고 또 성장하였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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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시작이다.

 

 

한정석 작가는 「대리사회」라는 책 속 위 문장에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체성을 회복한다는 건 지금 나의 상태를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네불라도 원망스러운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과거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성장한다.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이제는 늙어버린 네불라가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고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네불라는 본인의 유년 시절부터 노인이 된 지금까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한다. 수아는 얼떨결에 그런 네불라의 사진 촬영을 도와주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네불라가 과거 어느 독재자의 대역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아는 그런 네불라에게서 역겨움을 느낀다.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 또한 자신이 일하는 마트에서 매니저로 승격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함하는 상상을 한다. 모두가 원망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내 편으로 만들어 정규직을 따내겠다는 수아의 상상은 왠지 모르게 네불라의 과거와 닮아있었다.

 

네불라와 수아 서로 다른 듯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수아는 어린 시절 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기 위한 대리모 역할로 미국에 입양되었다. 수아는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자신보다 동생만 걱정하는 부모님을 보며 괴로워한다. 네불라 또한 어느 독재자의 대역 배우로 산 기억이 인생의 전부라는 점, 그 기억이 가장 찬란했음과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네불라의 사진전을 함께하며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이 과정을 통해 네불라는 과거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수아 역시 자신의 동생과 화해하며 모든 시간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신이 다른 존재로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해서 들어간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작품의 배경은 파라디수스라는 가상의 국가와 미국으로, 한국과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사실 많은 점에서 우리나라와 닮아있다. 전부 가짜라고 믿은 뮤지컬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불완전함을 직면했을 때 우리는 부끄럽다. 나도 가상의 국가와 내가 아주 어릴 적 딱 한 번 갔던 미국의 이야기이기에 나와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난 후 나 또한 네불라와 수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걸 자각했다. 나는 나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는 전부‘나’라는 키워드로 묶여있다. 주체성이란, 결국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한정석 작가의 작품은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하다. 각각의 작품들은 한국사 책으로만 봤던 한국 전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영국 그것도 빅토리아 시대, 가상의 독재국가인 파라디수스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가상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까지 한 이 뮤지컬들은 그 어느 책, 강연, 높은 어른의 말씀보다도 가장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관객이 작품을 통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먼저 창작자의 고되고 깊은 사색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작품 안에 녹여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나를 찾아가는 모든 여정에 한정석 작가의 작품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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