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신변에 변화가 생겨서 살아남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느라 달이 넘어가는지도 몰랐으니 ‘오랜만’이 맞을 테다.
그 사이에 개발자들 사이에서 팀 내 유일한 서비스 기획자가 되었고, 단시간이라도 근로할 데를 구했으며, 구청이 운영하는 사업에 합류하여 나름 몸담고 있던 업계에서의 경력도 지켜냈다. 근로할 데 역시 타인을 챙겨야 하는데, 여러 갈래로 에너지가 분산되어 돌덩이처럼 짓누른다. 분산된 에너지가 빠져나간 구멍에는 무게감만 남을 뿐이다. 지침, 힘듦 따위로 정의할 수도 없는 무게. 운세를 보는 걸 좋아하는 필자는 자연스레 점집에 눈길이 갔다. 그렇게 도망친 점집에서 한 가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형편을 관리하지 못하고 붕 뜬다고 하더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그런 나날. 그래서 지탱해줄 것을 찾아야 한단다. 지탱해줄 것으로 꾸욱 눌러 고정할 것. 처음에는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신경이 쓰여도 부정하면 그만이다. 말이 들려오는 부위를 차단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감정이 스며드는 바람에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다. 생각은 좋지 않은 감정으로 인해 오염되고 만다.
두 번째는 콘텐츠다. 현재는 콘텐츠가 주는 힘을 믿고 있다. 마냥 시간을 소비하는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재충전하는 시간이었음을 이렇게 되고서야 알았다. 철없을 적에는 밥 먹으면서 방송 보는 사람들이 싫었다. 시간이 아까웠다. 차라리 볼 예정이면, 본 방송을 기억했다가 평론으로 풀어내는 편이 이득으로 보였다.
필자는 ST 성향의 사람이다. MBTI가 무조건 옳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친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선을 긋고 사는 입장에서 판단은 제 몸을 장악했다. 판단은 상황을 겪으면서 깨진다. 깨진 조각 위로 새로운 깨달음이 탄생한다.
대표님의 지원 덕분에 재단 행사에 초대받았었다. 푸드 트럭에서 파는 음식, 시원하지만 살짝 더운 날씨, 그 날씨를 뚫고 관객들을 위해 공연하는 예술가들, 푸드 트럭에서 함께 줄을 서다가 자식한테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아주머니, 예술가들을 호응하며 힘껏 뻗은 손 등 사소하다면 매우 사소한 순간들이 ‘이렇게 살아도 되겠다’는 후련함을 데려온다.
타인을 챙기기 급해 ‘어떻게’ 무너져야 하는지 몰랐던 날도 있었다. 차라리 며칠을 잠식했다가 잠잠해진 후에 올라오지, 어떻게 건강하게 풀지. 이제는 그런 순간에 콘텐츠가 있으니 정리하고자 한다. 예술가들이 시간을 내서 생산한 콘텐츠는 다시금 다른 사람들 시간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이 글 또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읽혀질 테다. 콘텐츠는 시간을 유영하여 상대에게 다가간다.
시간의 상대성, 무형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의존적인 관계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