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담은 명작 《러브레터》에는 수많은 클리셰들이 등장한다. '잘못 배달된 러브레터'부터 졸업사진을 뒤적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 주인공의 죽음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까지. 그러나 이 영화는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설정들을 조금씩 비틀어서 사용한다.
보통 잘못 배달된 러브레터는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특이하게도 여주인공과 똑닮은 여자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그래서 나는 이 러브레터가 여주인공이 함께 하지 못했던 남주인공과의 시간적 공백을 되찾아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편지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바로 '묻혀있던' 여주인공을 꺼내온 것이다.
이 영화는 전반부까지 '와타나베 히로코'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이후부터는 '후지이 이츠키'로 서사의 중심이 반전되며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히로코 양, 중학생을 질투하는 거야?”라는 장난스러운 질문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후지이 이츠키가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어린 시절의 풋사랑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준다.
이츠키는 히로코의 부탁으로 동명의 이츠키(남주인공)와의 추억을 하나씩 되짚어나가며 모교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이미 죽었다는' 예상 밖의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어쩐지 불길할 수 있다며 히로코가 애써 돌려 표현한 그의 소식을, 이츠키는 그제야 마주한 것이다.
충격을 받은 이츠키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며 심한 기침을 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마는데, 위급한 상황에 놓인 이츠키를 두고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이는 논쟁의 내용이 꽤나 흥미롭다.
응급처치는 아까 들었다. 그렇게 해도 구급차는 안 와.
- 온다잖아요, 1시간 후에.
- 위급할 때는 전문가의 지시를 따라야 해요.
그때 병원까지 40분 걸렸다. 정확하게는 38분이었다.
그래도 손쓰는 게 늦었다. 어떻게 했든 이미 늦은 거였어.
지금 출발하면 구급차가 오기 전에 병원에 도착한다. 어쩌겠냐?
- 그래도 눈 속을 걷는 건 무리예요.
걷지 않아. 뛸 거다!
이 대화는 쓰러진 이츠키와 이미 죽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버린' 이츠키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
지금 와서 그와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골든타임을 놓친 사람을 살릴 수 없듯 사랑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화는 와타나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츠키가 소녀 이츠키를 만난 것은 한참 전의 일이기에 성인이 된 이츠키와 만날 와타나베는 어떻게 했든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츠키가 와타나베의 얼굴에서 이츠키의 얼굴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조차도 어쩔 수 없었던 사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할아버지가 그의 아들은 살리지 못했지만 손녀인 이츠키는 살릴 수 있었듯이, 새로운 사랑 역시 그렇게 무력하게 흘려보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할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늦는다고, 지금 잡고 싶은 사랑이 있다면 눈 속을 뛰어서라도 잡아야만 한다고,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편지에 담긴 추억은 당신 거예요.
추신. 도서 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그가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만 같군요.
와타나베 히로코님,
역시 부끄러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