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웹툰 제목은 ‘정년이’라 해도: 부용이에게 ① [만화]

웹툰 ‘정년이’ 속 숨겨진 주인공, 권부용
글 입력 2024.05.0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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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메인 이미지.

 

 

‘정년이’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약 3년간 연재된 완결 웹툰이다. 1956년 한국전쟁 직후 격동하는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며, 1950년대에 흥행했던 창극의 한 갈래인 ‘여성 국극’을 소재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꿈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여성 인물들 개개인의 복잡한 결핍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욕망이 한데 서로 얽혀 복잡한 그물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세세하고 현실적으로 포착하다 보니, 여성들 사이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따라서 작품의 주요 독자는 여성이고, 은근히 두꺼운 팬층을 유지하며 2020년에는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 콘텐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웹툰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리꾼이 되기 위해 목포에서 상경하는 시골 소녀 ‘윤정년’이 주인공이다. 이야기의 큰 틀은 주인공 정년이가 밑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국극 스타가 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윤정년이 스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더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바로 권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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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48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웹툰 ‘정년이’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이끄는 인물은 세 명이다. 주인공 윤정년, 그의 라이벌 허영서, 그리고 권부용이다. 권부용은 웹툰의 세 주연 중 한 명이지만, 국극 스타가 되고자 노력하는 연구생들인 윤정년과 허영서와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일반적인’ 학생이다. 여성 국극을 열렬히 좋아하고 작가까지도 꿈꾸는 여자고등학교 학생이며, 그렇기에 작품에서 대부분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목포 출신 가난한 소리꾼인 주인공 윤정년과는 다르게, 부용은 겉보기에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많은 지원을 받고 자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의 교육 수준이 계급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던 것을 고려하면, 부용은 상당히 고학력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일찍이 아버지가 안 계시고 계속된 가난으로 인해 어머니와 갈등을 겪어온 윤정년, 부유하지만 가족들 사이에서 겉돌며 외로움을 느끼는 허영서를 생각하면 부용의 가족은 자주 함께 문화생활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부용이라는 인물의 특성 때문에 그의 삶에는 윤정년과 허영서와 달리 갈등이나 방해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독자들의 가정은 웹툰의 극 후반부에 권부용이라는 인물의 삶을 전부 경험하고 나서는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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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5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권부용이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겪는 삶의 굴곡에 있다. 윤정년은 목포에서 서울로, 연구생에서 최고의 국극 스타로, 즉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시간에 따라 – 중간중간 여러 굴곡은 있을지라도 - 높은 곳으로 직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권부용의 그것은 다르다. 말 그대로 ‘굴곡’지다. 그의 이야기가 완전히 공개되기 전까진 다른 국극 연구생들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 지위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그러나 뒷이야기가 공개되며 부용은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취약한 지점에 이르고, 이후 다시 높은 곳, 즉 자신의 욕망과 이상향을 되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전체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지나간 2부까지도 독자가 그의 내면을 바라볼 기회는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부유하고 (당대 여성으로서는) 안전하고 화려한 그의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독자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했을 때 부용의 결점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권부용은 완벽한 존재가 되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경계하는 존재가 된다.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권부용은 시작부터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무도 부용이라는 인물을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난데없이 나타나 주인공 윤정년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알 수 없는 호의에 결점 없는 외면은 독자에게 긴장감을 준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오면 언젠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주인공의 목표를 계략으로 방해하는 적대자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미스터리한 그의 특징은 캐릭터 디자인도 반영되어 있다. 작가 서이레가 X 계정에서 언급한 권부용의 캐릭터 디자인은 ‘조용한 듯하지만 어딘지 서늘한 인상을 주는’ 느낌. 문학을 사랑하는 여학생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교복과 여성스러운 치마, 원피스를 입었음에도 가끔 드러나는 서늘한 표정에서 그의 고집과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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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01화. 출처: 작가 SNS 계정(@murmur_ireh)

 

 

부용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3부가 시작되는 91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마저도 전부 공개되지 않다가, 마지막 20여 화에서 폭발적으로 부용의 내면이 비밀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여기서 드러나는 부용의 배경은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희망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가풍, 노골적으로 여성이 창작한 작품을 탈취해 명예를 대신 누리는 착취적인 아버지다.

 

이런 억압적인 외부의 상황에 부용은 좌절한다. 겉으로 보이던 부용의 조용하고 무결한 모습은 사실은 강제로 침묵하는 모습이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서부터 독자는 부용이가 적대자가 아니라 사실은 정년이의 조력자(이자 이야기의 숨겨진 주인공)로 활약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부용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용이 이러한 사회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작가가 되는 것을 욕망하고, 오로지 그의 힘만으로 꿈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삶의 의미를 재고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정년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에 있다. 부용은 작가로서 윤정년을 욕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년을 연인으로 욕망한다. 그리고 이 두 욕망은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다.

 

이렇듯 3부에서 드러나는 부용의 비밀은 첫째, 그의 가족은 사실 화목하지 않다는 것, 둘째, 그의 작가를 향한 꿈은 억압적인 가풍과 사회적 분위기에 막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부용이라는 인물은 여성애자고, 부용은 그런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사실은 인생을 걸고 사랑과 꿈을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부용이 50년대를 살아간 여성애자라는 캐릭터 설정에 주목하려 한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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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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