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왕국의 경사

머나먼 한 왕국에서 벌어진 이야기
글 입력 2024.04.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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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 왕국의 하늘에는 빛 대신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런 왕국의 길거리는 곧 떠오를 태양을 마주할 준비라도 하듯, 벌써 사람들로 붐볐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걸어 다니는 상인들까지 사람들은 다양했다. 그 사이에는 중요한 일에 대한 준비, 그리고 기대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 하늘은 점점 푸릇푸릇해졌고, 마침내 붉은색 태양이 얼굴을 드러냈다. 뜨거운 햇빛이 길거리를 밝히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췄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태양의 열기를 느끼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은 새 시대가 열리는 날이었다.


왕국 중심에는 왕족이 사는 성이 있었다. 하늘과 태양을 찌르려는 듯 날카롭게 솟은 성의 꼭대기에서는 여왕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욕실을 촛불 하나만으로 밝힌 채, 여왕은 은은한 분위기와 깨끗한 물에 잠겨 있었다. 왕국의 시민들이 고대하는 오늘의 일은 그녀에게도 중요한, 그녀에 관한 일이었다. 목욕을 마친 여왕은 기다란 천으로 몸을 가린 채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색 커튼 사이로 햇빛 줄기가 희미하게 들어왔지만, 방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화려한 외모의 여왕은 물기가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방 가운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 한가운데에는 검은색 함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여왕은 열쇠를 집어 들어 함에 꽂아 넣었다. 철컥, 하고 함이 열리자 여왕은 함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함 안을 확인한 여왕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만이 아는 의미를 읽어 낸 것 같았다. 여왕은 몸에 두른 천을 풀어 벗어 하얀 몸을 드러내고, 함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함 안에는 검은색 드레스 하나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두 끈을 어깨에 걸쳤다. 이후 능숙하게 등 뒤로 후크를 채운 그녀는 드레스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옷을 입었다. 검지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왕의 몸에서는 우아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뿜어 나왔다. 여왕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옷을 입은 여왕은 방에서 나와 자신을 기다리던 호위병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말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채, 여왕을 성 지하로 안내했다. 말없이 호위병들을 따라가는 여왕의 얼굴에는 오묘한 표정만이 있었다. 성의 복도에서는 성 주위에서 환호하는 왕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라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듯했지만 여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성의 지하에 다다르자 호위병들은 커다란 문을 열었다. 이곳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개방되는 곳이었다. 여왕은 홀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여왕에게 친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섞여 있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성 밖과는 달리, 이곳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왕은 분위기에 맞추어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곳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자 옆에는 여왕이 믿던 장군이 서 있었으나, 둘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곧 장군은 입을 열었다.

 

"폭군 멜로디 여왕의 사형을 집행합니다." 장군의 말과 동시에 천장에서 매듭지어진 둥근 줄이 내려왔다. "예복부터 호위병까지는 저희가 갖추어 드린 마지막 예우입니다." 여왕은 말없이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이어 집행인이 여왕의 목에 밧줄을 걸고, 천장에서는 사형 방식을 알리는 천이 내려왔다. 천의 색깔은 교수형을 의미하는 검은색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왕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마지막 할 말이 있습니까?" 장군이 말했다. 여왕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지속되던 순간, 갑자기 여왕이 괴성을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이들은 그대들이다. 내 목이 부러지는 순간, 왕국에는 죽음의 저주가 내릴 것이니, 내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끝낸 여왕은 스스로 의자를 발로 찼다.

 

그녀는 죽음과 함께 침묵과 불길함을 남겼다. 여왕의 죽음이 발표되자, 그녀의 유언을 모르는 시민들의 환호는 더욱 거세지고 이를 경사라고 불렀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끌어 올랐지만, 왕국에는 저주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지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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