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무를 닮은 사람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여전히 '나'라서.
글 입력 2024.04.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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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K를 만났다. 작년 여름 운이 좋게 연락이 닿은 우리는 각자의 바쁜 일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는 봄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상기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는 K를 바라보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영과 해성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했을 때 서로를 보자마자 “어, 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K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고 7년 만에 보는 K의 얼굴도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다닌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고도 남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다닌 중학교를 두 번 졸업하고도 남는 시간 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방해물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공통의 기억이 있는 과거에만 머무르다 끝나기도 하는데, K에게는 함께 나눠 가진 어린 시절의 추억부터 각자의 고등학생 시절, 전공과 대학 생활, 요즘의 고민거리와 진로 계획까지 어떤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었다. 카페 마감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우리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거리를 걸으면서 K에게 그런 말을 했다. 사실은 네가 너무 많이 변했을까 봐 걱정했다고. 너를 볼 생각에 막 설레다가도 행여나 우리가 너무 많이 달라져서 다시는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될까 봐 마음을 졸였다고. 나의 솔직한 말에 K도 웃으며 동감을 표했다. 우리는 지하철역의 개찰구 앞에서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7년 만의 재회에 대한 기쁨을 서로에게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K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길이 갑자기 낯설게 보였다. 스물세 살의 내가 아닌 열 살, 열네 살의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K와의 만남은 나를 오랫동안 잊고 지낸 과거로 데려다 놓았고, 나는 그게 좋았다. 하지만 ‘K가 말하는 나’는 종종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K의 말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그 시절의 나는, K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당차고 성실한 나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성격도, 외모도 예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는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7년 만에 만난 K를 통해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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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했다는 말을 나답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다. 모든 인간은 원체 땅속에 굵은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사는 숲속의 나무와 같아서 타고난 그 모습을 지키지 못하면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 하나로 나는 내 생각과 행동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한결같은 내가 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썼다.


어른이 되는 것도 나에겐 낡아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떼어버려야 할 혹 같은 철없는 모습이 되고, 생각과 행동, 말투까지 교정의 대상이 되어 결국 모두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알 수 없는 저항감을 느낀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각지고 울퉁불퉁한 돌을 깎아 동그랗고 매끄럽게 만드는 것처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의 일부를 도려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내가 닳아 없어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거뜬히 살아가는 시대를 살면서 ‘진정한 나’의 모습은 전부 십 대 시절에 있고, 그것의 보존을 위해 나머지 팔십여 년의 시간을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었다. 게다가 내가 관성의 법칙을 진리로 삼은 동안 나에게 세상은 변덕스러운 곳이 되었고, 사람들은 세상의 변덕에 이끌리듯 살아가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한 곳에만 머무르려는 내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낡는다고 해서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 산 우산이 조금 낡았다고 해서 그게 우산이라는 사실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듯이 상태가 조금 바뀐다고 해서, 모습이 조금 변한다고 해서 본질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K와 7년 만에 다시 만나 친구의 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우리가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쉬지 않고 변해갔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였고 지금도 그렇다는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웠던 사람들이 아직 내 곁에 남아있는 것도,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가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여전히 ‘나’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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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나무의 본성을 생각한다. 나무는 한때 빛이 바랜 이파리를 모두 바닥에 떨구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가도 곧 다시 힘을 회복해서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푸른 이파리들을 마음껏 뽐낸다. 그 누구도 이런 나무를 보고 더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런 나무를 보고 변덕을 부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무가 나무로서 살아가는 모습은 되레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올 땐 그에 맞춰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내가 나인 것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고 싶다. 뿌리가 너무 약해서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쓰러질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나무가 아닌,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실은 아주 깊고 단단한 뿌리를 지니고 서 있는 커다란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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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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