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걷기의 기분 [여행]

여유있는 마음으로 깨달은 걷기의 소중함
글 입력 2024.04.0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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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하루에 얼마나 걷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얼마나’라고 물었으니, 답은 자연히 ‘몇 보, 몇 분, 몇 미터를 걷는다’가 될 테다. 그렇다면 그 답을 말할 때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서울에서의 나는 이 질문에 답할 때마다 내 이동 시간을, 그 효율과 걷기의 끝에 있던 약속을 생각했었다. 이동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걷기는 때때로 지하철과 버스의 도착시간을 맞추기 위한 뜀박질이 되기도 했고, 집에서 학교까지의 가까운 거리를 실감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서울에 있을 때도 걷기의 중요성을 여러 번 들었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라고들 했다. 늘 바삐 서두르면서 살면 분명히 무언갈 놓치게 되어 있다고. 이동이 아닌 목적이 아닌, 다른 걷기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다른 걷기는 뭘까? 내가 놓치고 있다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부러 걸어봤다. 생각처럼 미지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는 않았다. 이동이 아닌 걷기는 운동이었고, 낯선 곳에서 걷기는 네이버 지도와 늘 함께했다. 지도 앱과 함께라면 내가 모르는 길은 없었으니, 딱히 새롭지도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다시 지하철과 버스로 돌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이지 효율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에겐 걷기의 즐거움보다는 무언갈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이, 그 두려움보다는 낭비하는 시간의 아까움이 더 컸다.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허덕이며 대중교통에 나를 싣고선 SNS를 확인하거나 밀린 과제를 하던 내가 어제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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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질랜드까지 오고 나서야 그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걸어야만 보이는 것, 그건 마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웰링턴에서의 매일은 (과제 마감일을 제외하고는) 여유롭기 그지없다. 6개씩 꽉꽉 채워 들을 필요 없는 1학기 3~4강의 제도에 4월 초부터 중반까지 이어지는 2주간의 학기 중 방학도 있다. 6개에서 3개로 줄은 강의 덕에 시간이 생기니 매번 밥을 해 먹어야 하는 수고도, 배달이 쉽지 않아 매번 도심으로 내려가 장을 봐야 하는 수고도 너그럽게 봐줄 만하다. 아는 사람이 없어 약속도 잦지 않고, 애초에 외식 물가가 비싸니 친구를 만나더라도 집에 초대하거나 친구의 집에 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렇게 삶의 시간표가 널널하니 마음만 먹으면 산책하러 나갈 수도,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전부 서울에서 하던 것들 아니냐고? 맞다. 그래도 다르다. 매번 테트리스 쌓듯이 짜야 했던 일정이 텅텅 비어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내 마음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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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신기한 일이 생겼다. 익숙해진 거리를 걷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눈에 보이는 가게에 슬쩍 들어가 보는 것도 전부 재미있다.

 

새로운 곳이라 그러는 것 아니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한 달을 기다려 봤다. 완전히 익숙해진 동네를 걸었다. 열 번도 더 넘게 걸어온 길인데도 매번 즐거웠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어제 떨어진 나뭇가지가 어디까지 옮겨 갔는지 찾아보기 (웰링턴은 바람의 도시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라진 후였다), 늘 들리는 케이블카 정류장의 출발 종소리를 듣기, 먼 산을 올려다보며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지 고민하기. 이런 재미를 이제야 안 것이 억울할 정도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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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오늘 얼마나 걸었냐고 물을 때마다 내가 걸은 곳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내가 무슨 노래를 듣고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한다. 시간을 절약했다는 뿌듯함이 아닌 그 순간 느꼈던 즐거움을 떠올린다. 나는 이제 걸을 때 내 바로 앞보다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두고 걷는다. 몇 분 앞의 시간을 생각하며 초조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어색하다. 거리는 익숙해졌을지언정 이 행복함만은 아직 생경한가 보다.

 

사실 서울에 돌아가서도 똑같은 여유를 가지고 걷기를 귀중히 여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산더미같이 쌓인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릴 테니까. 나는 다시 효율적인 인간이 되어, 지하철에 몸을 싣고선 SNS 속 게시글들을 읽어댈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지금의 내가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겠지. 더 가끔은 지금의 여유를 되짚어가며 느긋하게 걸어도 볼 테다. 그 약간의 시간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더 즐겁게 걸어야겠다. 오늘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듣고 싶은 날이다.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 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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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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