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왜 힘들지가 않지?

글 입력 2024.03.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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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힘들지?


 

공교롭게도 이 공간에 글을 쓰는 시기는 거의 항상 월말쯤이다. 정말 진부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지만, 이때쯤이면 머리를 꽉 채우는 것이 그 달에 대한 감상이라든지 감회라든지 하는 것들이므로 이번에도 그 지겨운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날', 하는 몇 년 전 유행가 가사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시간의 흐름과 반복되는 풍경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변화 같은 것. 그런데 이 당연한 섭리가 나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시킬 만큼 요란하게 나이를 먹고 싶진 않다는 기분이 조금 들어서(이미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패 아닌가 싶지만) 글로 옮기진 않는다.

 

아무튼 상기의 고리타분한 감상을 제외하더라도, 요즘의 내 의식을 이루는 생각 덩어리들이야 여럿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몸집이 큰 하나는 바로 이것. 도대체 나, 왜 이렇게 안 힘든 거지?

 

그러니까, 말 그대로다. 이상하게 힘들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안 힘들면 좋은 거 아니야?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당연히 살기 힘든 것보단 수월한 편이 좋겠지. 그런데 유독 최근들어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동안 내 삶을 이뤄오던 근간 같은 것이 희미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평생의 태도가 형체를 잃고 흐물텅거리고 있다. 일관성도 일종의 '관성'인지라, 그런 태도에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내 생활을 굴려가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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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래


 

나는 자타공인 '비실이'다. 딱히 건강상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랜 좌식 및 와식 생활로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다. 책상 앞에서 생활하는 현대인 중에 운동부족 아닌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만, 그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체력이 꽝인 편이리라 자부한다.

 

문제는 체력이 곧 국력이란 말처럼, 이렇게 몸이 비실거리면 마음도 같이 시들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내 기분이 생리적인 매커니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건 정말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다. 하지만 잠 못 자고 끼니 부실한 상태로 사람에 치이다 보면 짜증을 참을 체력 같은 건 금세 바닥나 버린다. 결과적으로 난 몸과 마음 모두가 비실거리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물론 나와 달리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정말 닮고 싶다. 내 불경한 성격에 대해 힘들어서 그렇다며 변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난 나약한 범인이다).

 

따라서 보통은 바짝 곤두선 채로 생활해왔다. 자극을 견디는 건 그렇다 쳐도, 제일 품이 많이 드는 건 이미 내가 곤두서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는 일이었다. 성격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걸 그대로 표출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줘야 했다. 스스로도 유별나단 걸 알고 있으니, 세상 탓을 하지 않으려고 계속 그 점을 의식했다. 원만히 사람들 틈에 섞여 살기 위해선 누구나 이런 류의 노력을 한다. 내가 내 안의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것처럼 상대 역시 자신 안의 무언가를 부단히 견뎌내고 있겠지. 그렇게 자꾸 되뇌었다.

 

하지만 이런 이성적인 결론 역시 마비시켜버릴 만큼의 사건 혹은 감정들이 이따금 몰려왔고, 그럴 때 나는 펑 터져 버렸다. 진짜 못 해먹겠어, 눈물이 질질 흐르는 걸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한 고비를 넘겼다. 뒤따르는 휴식기 동안에는 구멍난 부분들을 채웠고, 그러다 바빠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짜증-체념-붕괴-보충'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벼운 짜증과 체념의 시간이 있긴 해도, 모든 종류의 부담이 나를 붕괴시킬 만큼 강력히 느껴지진 않는다. 올 상반기 캘린더를 쭉 훑어보면, 지금쯤 부족한 체력으로 몸과 마음 모두 헥헥거리고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정이다. 그런데 꽉 채워진 투두리스트 앞에서도 전처럼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럼 해야지 어떡해, 하고 느릿느릿 몸을 움직일 뿐이다.

 

여전히 바닥을 기는 근력과 체력은 마찬가지인데, 대체 왜 이러지. 매일 하던 짓을 그만두니 괜시리 불안해졌다. 나에게 할당된 행복을 다 끌어쓰는 기분이니까. 도대체 이 '할 만 한데?'하는 기분은 어디서 온 걸까. 개복치 중에서도 개복치인 내가 이렇게 무던할 수 있는 건 분명 어딘가 신경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한 달 내내 물음표 속에 빠져 살았다. 정말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물론 당장 떠오르는 몇 개의 요인은 있었다. 개중 제일 먼저 꼽게 되는 건, 쉬기는커녕 놀러 다니면서 거의 소진해버리던 짧은 휴식기 대신 제대로 왕창 쉬어봤다는 이유. 그동안 꼬박꼬박 집밥 먹으면서 위도 늘렸고, 위가 늘어 식욕이 생기니 끼니도 전보다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챙겨 먹게 되었다. 아무리 짧게 일을 해도 나에겐 아침형 생활 자체가 무리라는 걸 알고, 하루를 조금 느긋하게 시작해서 저녁 늦게 일과를 마무리하는 루틴도 새로 세웠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모두 시원하게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는 오랜 친구를 만났다. 마음의 많은 부분이 나와 닮아있는 친구였다. 내가 한창 몰두하던 이 의문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자 친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야, 나도 그래. 이런 지 좀 됐어. 그러니까 나만 이렇게 나사 하나 빠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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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검


 

그날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이 무뎌짐인지 무던함인지 뭔지 모를 묘한 변화에 대해 밤이 새도록 떠들었다. 완벽한 해답을 찾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 우리는 조금 의외의 곳에서 나름의 결론을 발견했다. 대화가 결국 닿게 된 지점은 뜬금없게도 인간간계에 대한 것이었다. 친구와 나는 관계에 대한 어떤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는데(너무 긴 이야기라 생략해둔다), 그것이 시간과 맞물리자 우리는 모든 종류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세상사 대부분에 대해 적당히 체념하는 법을 체화한 것이다.

 

내가 가장 많이 기력을 쏟던 부분, 그래서 때로는 내 모든 생활을 벅차고 짜증스럽게 만들던 과업은 다음과 같았다. 나의 겨를 없음이 남을 찌르는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또 상대의 겨를 없음에 대해 지나치게 서운해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 딱 그정도가 아닐까, 이런 내 말이 저 사람을 섭섭하게 만든 건 아닐까. 매번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머리에 김이 피어오르도록 온갖 것을 걱정하던 내 모습이 전생처럼 느껴진다. 내 기력의 대부분을 할애하던 문제가 사라지니 마음의 체력이 남아돈다. 그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렇게 정신적인 체력이 남아도니 어느 한 쪽이, 그러니까 몸이 좀 지쳐도 그냥저냥 할 만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나를 분명하게 미워하는 마음은 최대한 생겨나질 않길 바랐고, 내가 좋아하는 존재들을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뒤로 미뤄두고 싶지 않았다. 밀려날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좀처럼 '남'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미워하라면 하라지, 나도 네가 미워, 하고 먼저 벽을 치는 방식도 아니다.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물론 경솔하게 굴어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졌단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정말 얘기하고 싶은 건, 그렇게 '남'에 대해 생각할 만한 일을 만드는 것 자체를 나도 모르는 새 많이 줄여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안부 연락을 돌리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는데, 필요 이상으로 미안하지는 않다. 뻔뻔해진 걸까?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편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나만의 독단적인 해석을 하는 대신 그 의중을 뚜렷이 물어본다. 세상은 결국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버리면 세상에 대한 지나친 기대 역시 자연스레 사그라든다.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면서도 분명 나를 '이루고' 있던 고민들이 점점 아득해지고 있다.

 

사실 무심해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예전의 태도를 되살려보려고 노력해봤는데,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건 억지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의 난 그러려는 의도 없이도 그렇게나 마음을 썼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리고 더 웃긴 건, 내가 그런 버거움을 은근히 즐기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다. 정확히는 그 버거움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고, 그건 내가 가진 일종의 장점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매사 스위치를 켜둔 것처럼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세심히 살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건 분명 사실이다. 그 세심함은 양날의 검처럼, 나를 찌르는 대신 나의 무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내 손바닥은 날카롭게 베이지 않고, 잘 벼린 무기는 녹이 슬었다. 그렇게 무뎌진 칼날은 무뎌진 대로 뭉툭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넌 이제 예전만큼 일희일비 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하고.

 

전력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지 않게 된다는 것, 이따금 무너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 이건 그저 내가 조금은 능숙해졌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정말 내 마음이 낡아버렸기 때문인 걸까.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 미련스럽지 않고 싶은데, 안 되는 걸 해보려고 했던 요 근래를 생각하면 아직은 내 잔잔함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지나온 것 같다는 직감이 자꾸 들어서, 조금은 섬뜩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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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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