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돈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 -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도서]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라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글 입력 2024.03.1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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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존재하고 있어?


 

최근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집을 선물 받아서 읽었다. 문장마다 서린 지혜와 다정한 조언 덕에, 독서하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다. 잊고 있었던 배움의 재미를 일깨워 주기도,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기도 한 고마운 몰입의 시간이었다.

 

책 속에는 다양한 질문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삶의 본질과 하고 있는 일들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 아래의 구절이 인상 깊었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과연 나답게, 나만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그 시작이 언제였더라. 나답게 존재하기라. 자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부단히 나 자신을 명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 작업은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날에는 '이런 게 내 모습이지!' 싶다가도, ‘과연 나다움이라는 게 있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기 일쑤다.

 

모두가 각기 다른 DNA 배열을 가지고 있으니 태어날 때부터 나다움은 자연스레 우리 안에 있다고 보아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선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 선행되어야 하는 건 바로 존재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저 현재를 살아간다는 뜻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것은 실제로 있거나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걸 증명하는 것은 사람의 행동이고 행동은 동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나답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의내리는 과정과 동시에 인정, 즉 받아들임의 태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끊임없이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많은 매체에서 ‘존재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빛난다’고 이야기 하지만, 존재론적인 고민을 하는 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영향력, 그러니까 쓸모있음을 계속 어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온전히 존재학 위한 과정에서 나는 ‘보여지고 싶은 나’로 혹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행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한 번 더 생겼다. 왜 우리는 존재한다고 외치고 싶어할까? 자꾸만 드러내려고 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존재하고는 있지만 온몸으로 외치는 상태가 아니라면?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모습으로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과연 홀로일 때 외롭고 고독한 상태가 아닌 평온하고 충만한 상태일 수 있을까?



 

나답게 존재하기 위한 시작점 -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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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모든 것과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품위 있고 지적인 안내서”

 

 

도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은 초연결 시대를 사느라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건축/과학 분야의 칼럼니스트인 저자 아키코 부시는 다양한 과학적 시각을 기반으로 한 일상 속 예시를 총 11개의 챕터에서 풍부한 표현력으로 풀어낸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 및 행복과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명성과 가시성을 뒤집는 듯한 역설적인 책 제목부터 단박에 필자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몇 달 전 다녀온 명상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왔다. 푹 쉬고 오는 것에 전념하고자 했지만, 초연결사회에 심지어 지인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으므로 온전한 명상과 고요에는 결국 도달하지 못했다. 교교한 마음을 얻기가 이렇게나 어렵다니. 뜻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내 마음 하나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허탈감이 밀려와, 어떻게 하면 나무처럼 조용하고 꼿꼿하게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해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라지기 또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결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인 관점 그리고 나답게 존재하면서도, 내 모습을 전시하거나 과시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혜안을 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1. "권력, 시간, 중력, 사랑. 정말 강력한 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초반부 책 속에 언급된 소설 『클라우드 아틀라스』 속 문장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행위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서 이루어지기가 생각보다 어렵고,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강력한 힘들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에서 자연스럽고 열정적으로 발생하고 또 작동한다.

 

인생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어떤 상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 우정 등 인생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들은 가시화 하기 어려우며 수치화 또한 마찬가지로 어렵지 않은가.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서사의 위기』, p. 19)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하려고 하는 듯 하다. 비가시성이 주는 막연함과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잠재력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무쌍함은 유연성을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야기에는 늘 공백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하고 편집하는 일은 신경을 쓰면 할 수 있지만, 다시 펼쳐보지 않을 가능성을 높인다. 원래 이야기란 다시 펼쳐 보며 재편집을 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와 감정을 재생산하며 풍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경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호함일 것이다. 답이 없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잠재력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삶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극히 드물다. 모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다룰 수 있을 때 조금 더 평안한 마음으로 삶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2. 인간의 오랜 욕망 : 숨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지구상에서 인간이라는 개체 뿐이지 않을까. 그러한 개척 정신 내지는 탐험가적인 태도가 지금 인류가 누리는 수준의 세상을 만든 것이기는 하나, 섭리를 거스르다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는 섭리를 거스르는 행동 중 하나는 과도한 자기 노출이다.

 

어쩌면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오랜 욕심이자 자연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생존을 위해, 생명과 직결된 투쟁의 형태로 숨기를 택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숨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곤란해질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고자 할 때 등등 숨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는 이야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다. 투명 망토, 형체를 숨겨주는 알약…. 이처럼 숨고자 하는 욕망은 여러 형태로 설명되고는 했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상태는 왜 우리 모두의 꿈인 것일까.

 

필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갈 때면 종종 숨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헤드셋을 끼고 나만의 세계로 몰입하는 것이다. 특히나 붐비는 대중교통에서 효과적인 이 방법은 예민하고 시끄럽던 마음에 휴식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왜 숨고 싶다고 생각 했을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헤드셋을 끼는 것일까?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숨기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욕망을 인류는 갖게 된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 등 자기 PR이 만연해진 사회에서 더 이상 숨는 것을 원하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상품성을 떠드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이득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감이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하게 쓰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전히 숨기는 존재한다. 오래전 광장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인터넷 상의 공론장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될 때에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라진다는 것은 숨기와 어떻게 다를까?

 

사라지는 것과 숨기 모두 스스로 택할 수 있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 선택할 수도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환경적 문제로 인한 숨기의 경우, 문제가 있을 때 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또한 사라진다는 것은 지속적인 노출의 반대에 있는 상태로써 잊고 있던 가치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저자의 의견에 깊이 동의한다.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할 때우리 자신이 작아진다고 느낄 때가 너무 많아 놀랍다.

작은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서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연대감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

우리가 작아지고, 우리 존재감이 줄어들수록
우리의 연대감, 인간성은 더 커진다.
우리 자리를 찾으려면 먼저 그 자리를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중략)

 

사라지는 법을 이해하는 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일의 일부라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진다.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충만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법과
사라지는 법 모두를 아느냐에 좌우된다.

 

- p. 332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눈 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옅어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라질 때 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3. 쾌락 좇지 않기

 

현대 사회는 쾌락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발전과 연결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경로와 도구는 다양해졌다. 책에서는 그중에서도 SNS 중독과 연결 지어 보이지 않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보과잉시대에 살며 더욱 더 기록하고 전시하기 위해 애를 쓰는 현대인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9번째 장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자아>에서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에도 등장한다.

 

 

 시선의 소멸은 지각의 나르시시즘화로 이어진다.

나르시시즘은 허구의 이미지를 위해 시선, 즉 타자를 제거한다.
스마트폰은 타자의 추방을 가속화한다.

 

(중략)

 

디지털은 현실을 해체하고,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을 체화시키는 모든 상징을
허구의 것을 위해 점차 사라지게 한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침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서사의 위기』, p. 96~97

 

 

사실 우리에게 사라짐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p. 264) 자연에서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사라짐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 세계에서 그것을 추구하기란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실제로 맞닥뜨리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어딘가에 전시하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내면이 아닌 외면세계에 있다면 한 번 쯤 점검이 필요하다. 불특정다수에게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공유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전시가 갖는 위험성은 이 뿐만이 아니다. 한병철의 책에서도 말하듯, 디지털은 현실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시대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아카이빙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이미지 소비에 가까운 업로드는 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서 적당히 나를 지울 때, 오히려 내 존재와 가치가 뚜렷해질 수 있지 않을까. 어떠한 이유로 어떤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지, 전시의 목적이 그 누구의 부추김이나 사회적 분위기와는 상관 없이 행해진 것인지, 존재하는 것에 목매달며 전시 그 자체에 중독된 것은 아닌지 살펴 보도록 하자.

 

빠르게 변하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실과 진심을 찾아 나서는 태도가 아닐까. 수많은 선택지와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정답을 찾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정답을 솎아낼 수 있는 힘 말이다.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진짜의 삶은 드러나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알맞게 판단하는 사람이다. 정돈된 삶을 조용히 꾸려가 보자. 

 

 

4. 무상함 : 존재의 조건


그토록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까닭은 인간이 자신을 유독 특별히 여김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되면 잊혀질 것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우릴 끊임없는 노출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 우리는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까?

 

필자의 의견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단을 꾸려 생활했던 오랜 조상들의 생존 방식은 대를 이어오며 자연스럽게 현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내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생존에서의 유리함을 획득하려는 습성이 현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는 자기 노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것이지 않을까 짐작하는 것이다. 

 

무상함이 존재의 조건이 된다는 저자의 말은 현대 사회를 관통한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의 무상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라는 의견은 현재를 붙잡아 두거나 정의 내리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변화하는 위치에 있다. 오늘 있었던 것이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변하고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걸까? 옅어지는 걸까? 

 

옛것과 새로운 것의 통합이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딱딱하게 정의내린 삶보다 수정하며 나아가는 삶이 자연에 가깝다. 그렇기에 존재하기 위해서 사라지는 법을 익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5.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미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니듯,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존재가 미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때에 우리 스스로 가진 힘이 더 크게 느껴지거나, 스스로 가진 힘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 이 생각에 대한 좋은 예시로는 책에 등장하는 빙산 이야기가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의도적인 생략을 바탕으로 전체 문체를 고안했고,
“빙산의 움직임이 위엄을 가지는 건
빙산의 8분의 1만 물 위로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p. 190

 

 

이 대목에서 떠올린 단어는 다름 아닌 힘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음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완전히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마법같은 일이니 현실에서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그와 비슷한 상태는 경험할 수 있다. 바로 주변과 색감을 맞추거나 하는 등의 변장술로 자신을 숨기는 카멜레온 같은 동물이 그 예이다. 그는 변장술로 포식자로부터 살아 남거나, 먹이 사슬 아래에 있는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힘을 가지게 된다.

 

삶에서 빙산같은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 순간이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원래 연애라는 것도 상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을 때에는 시작이 어렵거나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가?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적당히 보여주고 적당히 사라질 때 더 즐거운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는 법이다. 힘을 진짜 숨긴 주인공이라는 ‘힘숨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인만큼 적절히 소비되고, 홀로 발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사라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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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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