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저항 - 영화 <버닝>

글 입력 2024.02.1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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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30분의 긴 러닝타임. 사건의 산발적 구성. 잔잔하고도 지루한 영상의 반복. 영화 <버닝>은 근래 본 영화 중(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지만) 가장 대중적이지 못한 영화였다. 영화에 담긴 심오하고도 철학적인 내용 때문에 누군가는 이 영화에 '예술 영화'라는 편한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담긴 소위 '예술적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너무나 밀접한 것이라서, 나는 이 영화를 '예술 영화'라는 편한 이름을 붙여 동시대 영화들로부터 소외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중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루한 영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2시간 30분이라는 휴식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영화. 하지만 이 긴 영화를 보고, 그것에 담긴 내용을 소화하다 보면 영화의 여운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낄낄거리며 현실의 고통을 잠깐 잊게 해주지만 이내 휘발되어 버리는, 우리의 소중한 휴게시간을 갉아먹는 5-10분 영상들과는 대조적이다.

 

주인공 종수는 화물 알바(정확히 어떤 알바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를 하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의 삶은 참 답답하다. 다 기울어져 가는 농가, 분노조절장애를 지닌 아버지,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간 어머니. 16년째 연락 두절된 어머니가 아들에게 다시 연락하는 이유는 그마저도 돈 문제. 종수의 삶은 '행복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종수의 지루하면서도, 답답하면서도, 멍하고 조용한 삶을 담은 잔잔한 영상에 공무원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삽입된다. 텅텅 빈 법원을 채우는 건 종수뿐이다. 이 영화가 참 재미없는 건 이런 현실성 때문이다. 그 어떤 장면도 극적이지 않으며 종수는 자신의 '비참한' 삶을 '바꾸어 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받아들일 뿐이다. 그는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

 

잔잔한 종수의 삶에 균열을 내는 건 초등학교 동창 해미다. 우연히 모 매장의 행사장에서 만난 해미. 여러 매장과 행사장에서 행사 혹은 상품을 홍보하며 춤을 추는 일을 하는 해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원한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족에는 두 종류의 배고픈 자들이 있다. '리틀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정말로 배가 고픈 사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들이다.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에 매료된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그레이트 헝거'는 해미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했지만,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벤'이라는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은 종수와 해미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부유하고, 여유로우며,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들이 있고,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자라왔다. 종수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이 많은 젊은 사람'인 그를 '개츠비'라 부르고,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는 말을 덧붙인다. 벤은 해미에게 흥미를 느고, 벤은 종수와 해미를 자신의 세상 - 여유롭게 파스타를 해먹고, 지적이고 여유롭고 부유한 지인들과 파티나 모임을 가지고, 가끔은 대마초를 피우며 일탈하는 -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벤은 이상한 취미가 있다. 바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남들에게 버려진, 쓸모없고 불필요해진 수많은 비닐하우스 태운다는 벤은 '저것들은 내가 태우는 걸 기다리는 것만 같다'며 절대자처럼 말한다. 종수는 벤이 위험한 사람임을 감지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날 해미는 그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누구도 그를 찾고,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을 찾으며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해미와 같은 처지의 종수다. 영화는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가 실은 '사회에서 버려지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며, 불필요한 사람'(혹은 여성)임을 암시하며 해미가 그에 의해 사라졌을 것임을 유추하게 한다.

영화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 같은 존재로 '사라져야 했던' 해미를 사랑했고, 기억하려 했던 종수가 오만한 절대자를 자처한 벤을 죽임으로써 마무리된다.

 

종수와 해미, 영화 속 등장하는 두 청년 주인공을 보며 퍼뜩 떠올린 단어가 있다. '대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다. 화물알바를 지원하는 지원자 7명 중 종수는 세 번째 사람이다. 관리자로 보이는 이가 사람들에게 묻는다. "집이 어디인가?" "야근이나 특근을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사람은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하며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란다. 두 번째 사람의 집이 작업장에서 먼 것을 확인하자 관리자는 바로 세 번째 사람인 종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종수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빠져나온다. 관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번째 사람에게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관리자는 화물 알바를 누가 하든 상관이 없다. 종수는, 그 자리에 있던 7명의 청년들은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 같은 존재다.

 

해미 역시 '대체'되는 존재다. 벤이 자신의 세상으로 해미와 종수를 초대했을 때 벤의 지인들은 모두 해미를 흥미롭게 생각했다. 아니, 우습게 생각했다. 아프리카 부시맨족의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이 추는 춤을 추며 감정에 복 받쳐 '삶의 의미'를 열망하는 그의 모습을 그들은 조롱했다. 해미가 사라진 후 종수는 해미 없이 벤의 모임에 참석한다. 그리고 해미의 역할을 대신하는 또 다른 여성이 중국에서 겪었던 일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해미는 '대체됐다.'

 

나는 우리 사회가 불안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종종 생각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좋은 곳에 취직하지 못하면, 남들보다 특출난 게 없으면 쓸모없어 질 것이라고,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결국엔 '대체될 것'이라고. 이러한 불안함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끝도 없는 경쟁에 참여해 자기 자신을 입증하려 한다. 마치 화물알바의 첫 번째 지원자처럼, '절대자'가 자신을 택하길 간절히 기다리면서. 영화에서 '절대자'의 역할을 하는 건 '개츠비'인 벤이다. 그는 '비닐하우스' 취미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버려진 비닐하우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국에는 그런 애들이 많아요. 한국 경찰은 그런 일(남의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 신경도 안 써."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버려진, 쓸모없어진, 불필요해진 '사람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외로운 이들. 그는 그들을 불태웠고,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람조차 대체되는 시대, 대체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몸부림쳐야 하는 처절한 사회. 나는 이곳이 지옥과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누구든지,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시대에 의문을 던지고, 저항한다. 벤의 취미를 들은 종수는 말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건 형(벤)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 누가 누군가를 불필요하다고, 쓸모없다고 결정하고, 그를 사회에서 지워내고 대체할 수 있겠는가. 해미 역시 '대체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자신을 '쓸모없다'고 판단하는 비정한 세상,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무수히 많은 이 냉혹한 현실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영화는 종수가 벤을 죽임으로써 마무리된다. 나는 이 결말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비극적이거나 잔혹한 결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이 세상의 절대자에게 종수와 같이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 저항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나는 종수의 질문을 바꾸어, 세상에 저항하고 싶다. 무엇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인지, 누가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사람인지 그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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